- 마음의 작동 원리
: 모사원리(모든 관념은 인상의 모사)와 연합규칙(유사성, 시공간의 근접성, 인과성)
- 이성의 제한적 역할
: 관념의 관계. 필연적 진리를 알려주지만 앎의 확장은 없다.
- 경험의 커다란 역할
: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서 앎을 확장 하게 한다.
- 경험이 주는 지식의 한계
: 관찰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정당, 타당하지 않다.
관찰하지 않은 경험을 받아드리긴 위해서는
항상성의 원리(미래는 과거와 같을 것이다.)가 필요한데
항상성 원리가 참이라는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순환논법이라는 논리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자연법칙의 근거는 관찰
관찰은 경험한 사실에 불과하다.
관찰된 사실이 아무리 누적된다 하더라도
항상성의 원리가 참이지 않으면
미래에도 그 법칙이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
필연적인 힘을 관찰 할 수 있으면
항상성의 원리도 적용가능 하나
필연적인 힘은 경험을 통해 관찰할 수 없다.
자연버칙 역시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일반적인 추론만 가능하다.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가 예측 불가능하듯(서근철의 행동)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현상도 다르지 않다.(뉴턴의 법칙)
인간과 자연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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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적 추론의 원천 : 관습과 습관
특정 행위나 작용의 반복이 동일한 행위나 작용을
재생하게 하는 경향을 불러 일으킬 때,
우리는 이 경향을 관습(custom)의 결과라고 한다.
-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인간 지성의 탐구 -
이성이 아닌 관습, 습관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가 과거와 유사하거나 같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자연적 성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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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화된 이성과 정념의 부상
이성은 정념의 노예에 불과하다
- A Treatise of Human Nature (인간본성론) -
흄은 데카르트의 행복론(엘리자베스 공주와의 서신 중 내용)과 대비되는 주장으로
이성은 정념(감정, 정서, 욕구)을 좌지우지 못한다. 고 말한다.
흄이 말하는 이성의 역할은
관념의 관계 혹은 겸험의 대상들 간의 상관관계를 들어낼 뿐이다.
- 뒷동산의 밤나무
- 밤을 먹고 싶다면 뒷동산으로 가라
밤을 먹고 싶은 욕구와 뒷동산으로의 이동
: 이러한 관계 파악은 그 자체가 행동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다시말해, 이성이 밤을 먹고 싶어 해라라는 것은 제공하지 못한다.
이성은 우리가 어떤 욕망, 욕구, 목표가 있을때
그것을 이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알려줄 수 있어도(관념의 관계를 설명)
그 욕구를 유발하거나 동기부여를 하지는 못한다.
이렇듯 흄은 우리의 마음이 작동되는 방식을
관찰하고 경험한 것을 근거로 이성의 힘을 축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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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이가? 두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삶의 목표
2.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
1.
삶의 목표를 정해주는 마음의 원천은 "정념"
좋음과 싫음은 정념의 문제이다.
나의 손가락이 긁히기 보다 세계 전체의 파괴를
선호하는 것이 이성에 반하지 않는다.
인도인 혹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미칠
아주 미약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나 자신의 파멸을 선호하는 것이 이성에 반하지 않는다.
- A Treatise of Human Nature (인간본성론) -
세계의 파멸보다 내 손가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세계를 중요시 여기고 그에 반해 내 손가락은
하찮은 것이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념이 있어야
손가락을 중히 여기는 것이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한 정념이 없다면 비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말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내가 어떤 것을 하고 싶다고 할 때,
그 하고 싶은 것이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아무리 설득하려해도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과 같은 감정
* 흄의 통찰
: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마음이 끌리고 고통을 주는 대상은 꺼리게 되는
우리의 정서적 반응이 우리의 삶을 기본적으로 규정한다.
2.
목표 성취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성"
자연 속의 인간
: 자연적인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
자연속의 식물, 동물, 다른 유기체들은
물리적인, 신체적인, 자연적인 욕구가 있고
그것을 충족 시키기 위해 영위해 나가는데
흄은 인가도 역시 그러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다만 인간은 특이한 점이 있다 => 도구적 합리성
도구적 합리성(도구적 이성)
: 목적의 타당성.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는 능력
인간이 자연의 다른 대상들보다 뛰어나고 특별한 이유는
도구적 합리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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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판단의 성격
도덕적으로 좋고 나쁨 역시 이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좋고 나쁨은 정념(감정, 정서)의 영역
도덕감각(moral sence)이란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덕스럽다),
도덕적으로 나쁘다(악하다)라고 할 때,
이는 그 행동들을 보았을 때 우리 마음에서
느끼는 승인, 불승인의 감정에 불과하다.
'도덕감각'이 정념적 측면에 근거한다라는 얘기는 받아드릴만 하다.
허나 '도덕판단' 또한 흄의 말대로 정서적 반응에 불과하다라고 한다면
인간은 개인적인 이익에 민감한데 그런 개인적 이익에 근거해서
도덕판단을 내린다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 뿐인가?
보편적인 도덕적 태도는 불가능 한 것이 아닌가?
예컨데,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보고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봉사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좋은것이라기 보다
마음에서 승인을 한 것이다. 봉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나도 도와줄 것이고
나에게 유리하니깐 승인을 한 것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
- 토마스 홉스 -
홉스의 의견과 같이, 이기적인 존재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회적 계약이나 협약을 통해 도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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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흄은 우리가 이기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하면서
공감(sympathy)을 말한다.
타인의 아픔을 예로 들면
- 나의 경험과 유사
- 유사성, 시공간상의 근접성 등 연합규칙 발동
- 그 강렬함의 정도에 따라 나 역시 그 감정 유발
공감의 기능으로 인해 내게 직접적으로 이익, 손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 역시 타인의 정념을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다.
즉, 흄이 말하는 공감이란
내가 상대의 기쁨, 아픔을 느낀다기 보단
상대의 기쁨, 아픔을 보고 나의 아픔이 상기가 되서
내가 같이 기쁨,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듯 흄의 공감은 이타주의적 고려의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유사성, 근접성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기주의적 요소 역시 잔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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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판단의 근거는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있어서
시대나 상황이 변함에 따라 우리의 정서적 반응이 변한다면
타인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난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결론이 도출되는 가능성이 배후에 존재하게 되는데
도덕이 그런 것일 수는 없다
마음에서 승인하냐 마냐와 같은 정서적인 반응일 수는 없고
보다 다른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였고
보편적인 도덕적 판단근거를 제시하려고 한 대표적 철학자가 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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