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2일 화요일

근대철학 : 칸트 01

앎에 있어서 이성과 자연의 참다운 관계는 무엇인가?
칸트는 이성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재정립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
"이성의 질서와 세계의 질서가 동형성"을 가지고 있다.
- 동형성(isomorphism)
: 질(재료)은 다르나 그 관계(형태)는 같다는 말

이성의 원리들이 세계의 원리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기 때문에
세계를 가장 잘 파악하는 방식은 세계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와 우리의 이성은 그렇게 잘 맞아들어가지 않는다.
이성을 세계에 적용을 하려 하지만 사실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과 세계간에 분리와 괴리"가 존재한다.
이성으로 이용하여 세계를 필연적인 틀로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세계, 자연속의 인간으로서
경험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정념, 감정의 역할이 크며
도덕적 역할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
인간은 자율적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여할 수 있다.
세계는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구성된다.
: 칸트 철학의 핵심 => 세상의 틀을 제공하는 이성

* 칸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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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작업이
물리학에서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가 한 일과 같다고 비유한다.

앎에 있어서의 혁명적 전환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대상들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중략)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 순수이성비판 -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세 권의 비판철학 중 첫 저서로 근대 인식론에 기여한 칸트의 대표 작품이다.)


즉, 우리의 앎이 세계를 쫒아가려 노력하였고
그러다 보니깐 무너지고 말았는데 (흄의 지적과 일맥상통)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대상(세계)을 좆는 것이 아니라
대상(세계)이 우리를 좆는다는 전환적 사고를 해 보자는 것


세계와 우리의 관계의 변화
1. 우리의 앎이 세계를 따른다.
2. 세계가 알려주는 대로 우리는 안다.
=>
1. 세계가 우리의 앎을 따른다.
2. 우리 방식대로 세계를 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계가 알려진다.

그렇기에 칸트의 철학에서
이성은, "틀"이자 "입법자"이자 "세계를 구성하는 이성"으로써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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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앎이란은 무엇일까?

칸트는 형이상학서설에서 앎을 분석하면서
두 가지 요소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형이상학서설(Prolegomena)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내용을 간추려 다른 방식으로 풀어 쓴 책이다.-모든 철학서가 이전까지는 라틴어로 쓰였는데 순수비판이성은 최초의 독일어로 쓰인 철학서여서 읽히기 쉽지 않았다.)

앎의 두 가지 요소
1. 질료(materie) :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나로부터 기원하지 않은 재료
2. 형식(form) :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어떤 틀

우리 주변의 다양하고 무질서한 감각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질료
내 주관기능인 형식이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여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이 인식되고 존재하게 된다.

즉, 대상은 주관에 의해서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 구성설(Construction Theory)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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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에서
순수는 경험적인 내용이 들어가지 않음을 의미하고
비판이란 능력과 한계를 알아보는 것을 뜻한다.
즉 , 순수이성비판은 (광의의) 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칸트는 이성을 분석하였고
광의의 이성은 세가지를 요소를 가진다고 말한다.

1. 감성
2. 지성
3. (협의의) 이성 : 판단 간의 관계를 추론하는 능력

앎에는 두 가지 요소, 질료와 형식이 있다라고 했는데,
칸트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앎의 능력(인식 능력)을 이성이라 했을 때
이성은 감성, 지성, 협의의 이성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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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말하는 감성은 감정이 아니다.)
"감성"이란 우리가 대상에 의해서 촉발되는 방식에 의해
표상을 받아드리는 능력(수용성)이다.

앎을 위한 경험에 있어서
경험의 재료는 질료(materie)라고 할 수 있는데
질료는 나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주어진다.
그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 능력이 감성.
이러한 감성에는 틀(형식)이 존재한다.

다시말해, 내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앎의 재료가 되는 것들이 생겨난다고 얘기할 때
무작정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드리는 틀이 존재하며
그 틀은 시간과 공간이다.
=> 감성의 형식으로서의 시간과 공간

어떤 감각이 주어질 때, 그 감각이 정리 되는 방식은
가장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정리된다.

시간에 대한 학문 : 산수
공간에 대한 학문 : 기하학

경험하는 대상은 모두 시공간상에 위치하므로
감성에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 즉 산수와 기하학은
필수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적용된다.
=> 수학(산수와 기하학)의 필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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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란 외부로부터 촉발된 내용을 정리해
판단의 형태로 완성시키는 이성의 한 능력

칸트에 따르면, 감성에 의해 시공간적으로 정리된 내용이 앎은 아니다.
감성에서 주어진 바를 정리하여 '무엇임'으로 규정이 되어야 앎이 된다.
=> 판단의 틀(범주 형식)을 제공해주는 지성


범주 (칸트는 12 종류의 범주를 말한다)
- '무엇임'의 기본적인 규정
- 실체의 지속성과 변화 등 존재하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규정을 제공하는 개념
- 이 틀은 지성에서 주는 것이고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 범주는 이성(오성)의 자유로운 입법활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개념
  => 입법자로서의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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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틀(범주)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판단이 가능한 것이고
칸트는 이 얘기를 아래와 같이 바꿔 놓음으로서
자연과학을 정당화 시키려 노력한다.

우리가 세상에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만족시켜야 될 원칙들이 있는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고 지속성을 지녀야 하고
인과적 법칙을 따르는 대상이어야 한다.


판단 가능한 자연과학의 법칙
1. 변화 속에서 지속하는 실체
2. 인과적 법칙을 따르는 존재

저것은 책상이다.
- 변화 속에서 지속되는 실체
- 인과적 법칙성을 따르는 대상


참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인정하려면
그것은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러한 요건은 우리가(우리의 이성이)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참으로 존재한다라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인과의 관계 속에 들어와야 하는데
(누구나 감성에 의해 인지가능하여 상호작용의 틀 속에 들어와야 한다.)
이 또한 우리가(우리의 이성이) 부여한 원칙이다.


이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참으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위해서는
물리학의 법칙과 자연과학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자연과학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적용됨


[흄]
- 자연을 관찰하고 경험하여 이것들이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지 고민
   vs
[칸트]
-  자연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  자연법칙은 우리의 이성이 제공한 틀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경험된 세계에 적용된다.

경험한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세계
- 구성의 원칙은 우리 이성에서 부여
- 우리 이성이 제공하는 구성의 틀을 따를 수 밖에 없다.
- 그 틀이 경험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들(수학적, 물리학적 원리)의
  보편타당한 적용을 보장한다.
- 경험되는 세계는 수학과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 칸트는 로크의 백지설 -인간의 타고난 정신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와 같은 상태임을 지칭하는 비유- 에 반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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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생각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구성한 세계(현상)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그 자체로서의 세계)가 따로 있지 않겠는가?

세계가 우리의 감성을 촉발시킨다고 했는데
감성 촉발의 주체, 즉 수용성에 영향을 주는 것
: 있는 그대로의 세계

우리가 이성의 틀로 구성한 세계
: 현상 세계

이러한 구별은 칸트의 철학 내에서 아주 큰 문제로 등장하고
칸트 또한 인정을 하고 있는 구별이다.


물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촉발을 해서
우리는 그 촉발(질료)을 시공간적으로 정리를 하고
그것에다가 또 우리의 기본적인 이성적 개념 틀(형식)을 씌워서
이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질료와 형식의 결합물이 세계인 것이다.


두 가지의 세계
- 현상 세계(구성된 세계) : 우리의 것, 우리에게 드러난 것으로의 세계
- 물 자체 (Ding an sich) : 그 자체로 있는 세계(촉발의 주체)

=> 칸트의 이원론적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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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싶은 세계는 무엇일까?

Q)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알고 싶은 것이지
우리가 구성한 세계는 궁금하지 않다

A) 칸트의 답 :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우리에게 드러날 수 없다.
세계는 우리가 틀을 지운 세계, 우리에게 드러낸 세계이다.

Q) 사람마다 세계를 달리 볼 수 있으니
사람마도 각각 세계가 다르다는 말인데
이렇게 되면 보편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A) 칸트의 답 :
물론 개인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부분도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틀인 감성의 형식(시공간)과 지성의 형식(범주)은
모두에게 공유된다.
그리고 이 틀이 인간에 있어서는 유일한 틀이다.

(위 내용들이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인 증명의 내용이다.)


칸트의 말대로라면
나는 시공간적으로 세상을 안 봐, 라는 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현상 세계, 구성된 세계)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이성에 근거한 형식(form)을 따른다.
=> 이성이 형식(틀)을 부여하지 않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틀이 모든 것을 부여할 수는 없다.
경험의 내용은 물자체로부터 오는 것으로 이성이 만들어주지 못한다.
허나, 그 자체로 있는 세계가 우리를 촉발해서 부여되는 질료만큼이나
우리의 사유의 틀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이 세상을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과학법칙들은 세계에 적용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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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법칙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

흄의 문제제기를 얘기하고
우리가 원하는 해결방식을 말한 뒤
칸트가 그것을 거부하고의 원치않은 방식으로의
해결한 것을을 살펴보면



만유인력이 필연적인 힘이라는 것이 관찰 된다면
세상에는 만유인력이 필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질량이 있는 모든 물질은 만유인력이 작용한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의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일 뿐
만유인력의 힘 자체는 관찰이 불가능하다.

반복되는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힘이라는 개념을 나중에 만들어 낸 것이지
힘은 관찰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해결책
만유인력을 관찰하는,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래서 힘을 관찰하고 뉴턴의 법칙이 맞다고 말할 수 있어서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가 없이
흄이 제기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되는 것


칸트의 지적과 해결
그런 힘은 세상에 없기때문에 관찰 할 수 없다.
필연적 힘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틀이 부여하는 한 경우이다.
우리는 그러한 힘의 관계 속에 있는 것들만
세상에 참으로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고
우리가 세상을 그렇게 구성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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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입법자로서의 이성의 역할은
비단 앎에서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흄의 정서적 반응로서의 도덕적 판단은
각각의 정서적 반응이 다름에 따라 보편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칸트는 세상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받아드리기 위한 조건들이 이성에 근거하듯이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도덕원칙이 있음을 주장하여
보편성을 확보하려 한다.

* 칸트의 도덕철학에서의 핵심
: 이성적인 존재이자 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격
- 스스로가 인정한 법칙을 스스로에게 부여함
- 정념이나 경험을 넘어선 보편적 도덕법칙(정언명법) 확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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