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9일 화요일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 01

박찬국 교수 강의


<존재와 시간>에서 근본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흔히 우리가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런 실존적인 물음이 아니라 존재론차원적인 물음이다.

"존재"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단순히 사물들이 여기 있다, 그런 의미로도 쓰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의 존재, 인간의 존재, 신의 존재와 같이 여러 존재 영역들을 가르키는 의미로도 쓰인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다양한 존재 영역들을 다 포괄하는 전체를 가르키는 의모로도 사용된다.

하이데거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존재의 유형, 존재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뭐냐' 그런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 존재 이해의 지평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하이데거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미 전통적 철학에서도 존재는 시간이라는 지평으로부터 이해는 되어왔다고 보고 있다. 감각적인 존재자들,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존재자들은 끊임없이 시간적으로 변하는 것들이고 수학적인 것과 같은 관념적인 존재 영역은 비시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 초감각적인 존재자들, 신과 같은 것, 이데아같은 것은 초시간적이다. 이와 같이 전통 형이상학에서도 그 존재 영역을 구별할 때 자기들이 의식을 했든 안 했든 간에 시간을 하나의 실마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런 실마리가 되는 시간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여지껏 서약철학에서는 시간을 '지금이라는 시점의 연속'으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그런 시간 개념을 "통속적인 시간 개념"이라고 한다. 시간을 생각할 때 항상 이런 통속적 시간개념을 중심으로 사고하다보니 신, 자꾸 이데아가 감각적인 존재자들의 궁극적인 근거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통속적인 시간이 사실 시간의 근원적 형태가 아니라 세계시간(Weltzeit)으로 부터 추상된 파생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본다.

세계시간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은 밥 먹을 때다', '지금은 강의할 때다' 이런 때의 시간을 가르킨다. 나름대로의 일정한 폭을 갖는 시간이다. 그리고 어떤 생활세계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통속적인 시간은 이런 생활세계적인 그 의미를 완전히 사상해버린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통속적인 시간은 생활세계,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그런 시간에서 파생된 것이다. 결코 근원적인 시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 추상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하는 대부분의 작업은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인간의 존재 방식은 시간성이다."고 결론 내리며 이 시간성이 존재 이해의 지평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며 끝내고 있다.
그래서 이 <존재와 시간>의 체계를 어느정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소 추상적이고 딱딱한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서,
그런데 이 세계시간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근원적인 시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있는 '시간성'에 뿌리박고 있다. '지금은 밥 먹을 시간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이 시간적인 존재 방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반복해서 설명하면 통석적인 시간의 근원이 되는 세계시간은 다시 인간의 존재방식인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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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성이란 '기재하면서-현전화하는 장래'로서의 시간이다.
(하이데거가 자기의 독자적인 언어를 저렇게 만들어내다보니 내용 자체도 어려운데 언어자체도 기괴해서 아주 난해한 것이다.)

기재한다는 것은 과거와 관련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일단 우리 인간을 장래적인 존재라고 본다. 인간은 항상 어떤 미래의 가능성, 뭔가 실현해야 할 과제라든가 가능성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그런 과제나 자기 삶의 가능성을  진공 상태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그 형태, 과거에 자기가 쌓아왔던 경험들, 자기가 이미 처해있는 과거의 상황,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삶의 가능성과 계획 등을 추구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미래의 가능성을 구상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일정한 형태로 반성하고 대결하면서 자기가 현재 뭘 해야 하느냐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계획에 입각해서 현재의 삶을 규정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존재 방식을 "시간성"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철학에서는 인간을 파악함에 있어 이런 상식적인 인간 이해가 토대가 되어있지 않았던 경향이 있다. 오히려 인간을 하나의 고립된 의식으로 본다든가, 아니면 후설(Husserl)같이 의식의 흐름이라든가 이런식으로 보는데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 의식같은 것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와 관련하여 현재의 상황을 개시하는 시간성의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런 시간적인 성격, 시간성이 근원적인 시간이라 부르며 다양한 존재 영역들을 파악할 때도 결국은 이런 근원적인 시간인 시간성을 실마리로, 토대로 해서 파악해야 한다. 그런식의 결론으로 <존재와 시간>을 마무리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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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에서 구체적으로 하는 작업은, '인간의 존재를 파악하는데 있어 궁극적인 지평이 되는 것이 시간성이다' 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 거의 전 내용을 다 차지하고 있다.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바탕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탐구하자면 인간 그 자체,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실마리로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존재가 이해되는 장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의 경우 어떤 대상을 본능적인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만 볼 뿐이지 고유한 존재 방식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허나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이 각자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꽃을 선물로 주는 등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 존재방식을 개념적으로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꽃의 고유한 존재방식이 있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을 '존재가 자기 자신을 개시하는 장', '존재를 이해하는 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은 나타날 현, 존재가 나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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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을, 인간의 존재 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인간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실존적 존재인 것이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동물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지만 우리 인간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라 보는 것이고 인간들의 모든 행위나 생각에는 이런 실존으로서의 존재방식이 다 근저에 깔려있어서 인간들의 모든 감정, 기분, 생각을 규정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이라든가 감정적인 부분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항상 인간의 실존적 성격을 염두하고 분석해야 된다고 봤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불안이라든가 권태에 대해서 분석을 하는데, 그런 분석들은 다른 철학자들이 이미 많이들 해 놓았지만 그런 분석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 실존 :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존재

* 요즘 유행하는 사유 경향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어떤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적인 입장이 상당히 힘을 얻고 있다. 똑같이 다 생존본능, 그것이 가장 큰 기본적인 본능인 것이고 인간들의 어떤 가치나 규범, 이런 것들도 결국 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도저히 건널뛸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보았고 인간의 육체마저도 동물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보았고 "인간의 손은 원숭이의 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데리다 및 일부 학자들은 하이데거가 인간중심주의에 빠졌다고 비난하지만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말할 뿐이지 인간의 우월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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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이는 생활세계적인 의미를 갖는 각 존재자들이 결합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어떤 가능성을 추구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강연장을 예를 들면, 모든 것들이 지금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강사가 강연을 하고 청중이 강연을 듣는다, 그게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것을 목표로 하여 교탁이라든가 책상이 적절한 위치에 다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배치되어 있다. 이런 것이 다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강연장에 들어와서 책상에 앉을 때 이미 강연장의 목표와 강연장 내에 위치한 사물들과 그 사물 간의 관계들 거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즉, 세계-내-존재란 이런 서로간에 밀접한 의미 연관을 가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과제, 가능성, 이런 것들을 추구해 나가는 존재이다.

사실 이 또한 아주 상식적인 얘기이다. 하이데거는 왜 이렇게 상식적인 이야기를 세계-내-존재로서 상당히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느냐. 그것은 철학이 출발점이 바로 이런 아주 자명한 구체적인 사실성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의 철학은 그러하지 않았다. 기존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분석, 의식에 대한 분석, 인간의 사고능력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었다고 볼 수 있고 그러면서 구체적인 인간과 그러한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세계가 빠져버렸는데, 이런게 철학의 토대가 되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질은 '심려(sorge)'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본질 - 현존재로서의 심려
: 현존재는 하나의 세계안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하려고 하면서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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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하이데거의 인간에 대한 분석의 몇몇 핵심 개념을 살펴봤는데 여기에 전통적인, 특히 근대철학에 대한 비판이 분명하게는 아니지만 이미 내밀하게 함축되어있다.

데카르트 이래의 근대철학은 인간의 의식을 외부 세계와 단절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근대의 합리론 철학은 인간의 의식 안에 이미 하나의 명증적인 관념들이 존재한다고 봤다. 본유관념 또 생득관념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철학의 과제나 학문의 과제는 그런 생득관념, 명증적인 본유관념을 연역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면 우리 인간의 의식에 존재하는 관념들을 단순히 연역해낸 이론들이 외부 세계와 어떤 식으로 일치 할 수 있느냐, 우리들이 가지는 주관적인 표상, 관념과 외부 세계가 어떤 식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경험론도 마찬가지로 부 세계의 어떤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관념을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주관적인 경험, 감각 자료들, 거기에서 결합하고 추상해낸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그렇기에 우리의 주관적인 관념이 실재 세계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냐는 식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이데거는 근대철학의 이런 식의 문제 제기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일종의 철학의 스캔들이다, 애초에 인간을 잘못 파악한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 것이다.

전통적 철학의 경우는 인간이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은,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거나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토대를 두고서 그것들을 사용하고 이용한며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런 지각과 이론적인 인식 이전에 사실은 우리가 이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우리들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사물들을 눈 앞의 대상으로 주체화시키지 않고 사용할 때 그 사물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다.

의자에 앉을 때 의자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지각하고서 의식해서 앉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앉는데 이것이 의자를 의자로서 가장 잘 이해한 것이다. 주사위를 이용할 때 꿰둘어지게 관찰하고 이런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 이론적 인식보단 오히려 그냥 주사위를 가지고 놀 때, 그럴 때 주사위가 주사위로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즉, 이론적인 객곽화 이전에 삶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존재자들과 관계하면서 그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이미 다 드러나 있다고 보았고 이렇게 드러난 것을 토대로 해서 비로소 구체적인 지각이나 이론적 탐구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이미 존재자들과 관계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는 주관적인 표상, 관념이 외부세계와 어떻게 일치할 수 있냐는 문제는 일어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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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크게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내용적으로도 구분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실존이라 하였는데 인간의 실존방식을 크게 둘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비본래적 실존방식, 또 하나는 본래적 실존방식이다.

현존재, 세계-내-세계, 이러한 개념은 비본래적 실존이든 본래적 실존이든 상관없이 두가지 실존방식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1부에서는 이렇게 비본래적인 실존과 본래적인 실존, 양자에 공통된 인간 특유의 현상을 분석하는 부분이 있고 그 다음에 절반은 비본래적인 실존 방식을 다루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우리가 세계 내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비본래적 실존이고 세계 또한 비본래적 세계라는 그런 식의 얘기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래적인 세계와 실존을 이야기한다.

1부까지는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그냥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부부터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시간성, 죽음에 대한 분석, 양심에 대한 분석, 결단성 분석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하이데거의 주관적 체험이 많이 개입된 듯하여 그 내용이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2부와 관련하여, 비본래적 실존이 본재적 실존으로 어떤 식으로 넘아가고 그 다음에 본래적인 실존방식은 어떤 식의 양상과 내용을 갖는가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예를 이용하여 설명하려 한다.




댓글 1개:

  1. 가장 쉬운것을 가장 어렵게
    가장 단순한것을 가장 복잡하게
    말하는것이 철학같아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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