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30일 수요일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 02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예로해서 비본래적 실존이 본재적 실존으로 어떤 식으로 넘아가고 그 다음에 본래적인 실존방식은 어떤 식의 양상과 내용을 갖는가를 설명하면 훤씬 더 이해가기가 쉽지 않을까 한다.

부족함 없는 상류층의 삶을 살면서 세속적 가치, 사회적 성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가 불치병에 걸리면서 처음에는 자신의 불행에 분노하지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점차 자기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면서 전폭적인 회심,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비본래적인 실존에서 본재적인 실존으로 넘어가는", 실존적인 변혁을 겪게된다.
( 하이데거도 <존재와 시간>에서, 특히 죽음을 분석할 때 하나의 범례로서<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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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내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냥 세상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사람들이 정한 가치, 규범에 근거한 삶. 서울대가 좋다하니 서울대에 가려하고 대기업이 좋다하니 대기업에 가려하는 이런 식의 기준에 따라 살고 있을 뿐 사실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익명의 세상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도 자신이 살고 있었던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과 관행, 도덕률에 따라서 살았다. 예심판사가 되어 상류층 사회에 편입하려 했고 사람들이 명랑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런 명랑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사회가 결혼해서 가정을 가진 사람을 정상적으로 보니깐 자신의 수준에 맞는 여자를 만나 그냥 결혼했고, 거만해서는 안된다는 도더률에 따라서 또 거만한 사람을 타인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겸손하려 했고 그러했다. 이반 일리치는 외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도덕적이고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에서 사람들은 격차에 대한 우려, 심려에 사로잡혀있다'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의 격차는 비교 의식이다.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면서 그 격차를 의식하게 된다. 이 격차를 의식하는 비교의식이 비본래적 실존을 지배하는 삶의 양상이라고 본다. 그러다 보니깐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시기와 반복, 질시,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배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른 인간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는데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에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호기심 차원에서 그칠 뿐이다. 정말 걱정하고 관심을 갖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권태 등을 잊기 위해 상대방과 상대방의 문제를 호기심 거리, 가십 거리, 잡담과 수다 거리고 삼아버리는 삶의 행태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상대방을, 세상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것 처럼 착각한다. 하이데거는 그런 특성을 "애매성"이라 부른다. 애매성은 사실은 피상적으로 이해하면서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현상이다.

정리하면,
비본래적인 실존은 격차성에 대한 근심, 그것과 아울러서 호기심, 잡담, 애매성, 이런 것에 의해서 관철된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라는 존재 양식을 가진 상호 존재는 서로 떨어져서 무관심하게, 나란히 존재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라는 가면을 쓰고 서로 위하는 척 하면서도 애매하게 긴장하면서 서로 살피면서 남몰래 서로 엿듣는, 반목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이 비본래적 삶이 보이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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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비본래적 실존양식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하이데거는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것이 비본래적 실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존재 양식을 실존이라 하였다. 사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특히 죽음을 생각할 때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어떠한가? 모든 것이 허망하다. 죽음 앞에서는 내가 하는 걱정, 고,민이 모든 것이 사소하고 헛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는 식의 고민을 하는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실존적 존재가 되는 것은 죽음과 대결할 때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적 존재라고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면서 그냥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다. 물론 하이데거는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라고 보았다. 자기가 책임져야 될 하나의 선택이며 그 점에 있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삶을 문제 삼은 거지만 제대로, 본래적으로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죽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죽음을 'sterbend'이라 부르며동물의 죽음(소멸, vereden)과 구별하고 있다. : 죽을 자로서의 인간
동물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실존적인 고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동물은 소멸하는거지 죽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가장 고유하고 다른 가능성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으며, 무규정적이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모든 가능성은 누가 대신, 대리해서 해 줄 수있다. 허나 죽음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고 오직 나만의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할 때 나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에게 직면하게 되고 내가 추구할 가장 고유한 삶의 가능성, 이런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죽음 앞에서 내가 추구했던 모든 가능성들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죽음에 의해 다 추월당할 뿐이다. 그것과 아울러, 죽음은 아우리가 정말 말로 살아서 추구해야 하는 가능성에 대해 알려준다.

이런 죽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무규정적인 것이지만 언제가는 오는, 죽음은 우리에게 임박해 있는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인간 일반은 죽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사고하면서 죽음을 망각할 뿐이다. 비본래적인 실존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가 이러한 죽음에 대한 망각이다.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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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병에 걸린 이반 일리치는 육체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했다. 그러다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 영혼의 목소리를 "양심"이라 말한다.
어떤 특정한 도덕률에 위배되었을 때 자책감을 느낀다던가 하는 이런 우리 마음의 기능을 보통 양심이라고 하는데. 하이데거 양심을 그렇게 파악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세상사람의 규범에 따라 살면서 나의 참된 가능성, 진정한 가능성을 망각했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가책이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가 우리를 일깨운다는 것은 '세상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서 너 자신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찾아라'는 부름이다.

그 양심의 소리가 '너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 이렇게 묻자 이반 일리치는 '이제까지 살아왔듯이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고 싶다'고 답했다.
그 양심이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느냐' 다시 묻자,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보니 제대로 산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주 먼 소년 시절의 기억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현재에 가까이 올 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삶은 불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혼생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환멸, 관능, 위선이고 직장생활은 돈벌이를 위한 노동, 생명력 없는 공무, 항상 똑같이 흘러간, 더욱 더 죽어가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를 반성하면서 참된 삶의 가능성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그래서 양심의 소리는 말없이 우리를 부르면서 본래적인 실존 가능성을 개시하고 이런 본래적인 실존 가능성에 대한 책임 의식을 일깨운다.


이반 일리치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에 대한 집착, 미련 등을 다 포기하게 되고, 그에게 원래 숨어 있었던 삶의 본래적인 가능성이 드러난다. 예전에는 아내나 가족에게 원한만 가졌는데 아내나 딸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인격의 존엄성을 갖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용서를 빈다. 그리고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고통으로 벗어나 죽음 대신 광명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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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가 아플 때 유일하게 그를 돌봐준 사람은 게라심이라는 하인이었다.
이반 일리치가 '너는 왜 나를 도와주냐, 우리 가족들도 나에게 무심한데' 라고 묻자 게라심은 답한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운명에 있죠. 그렇다면 제가 나리에게 봉사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있겠습니까?"

게라심같은 사람은 하이데거 표현을 빌리면 '죽음에로 일찌감치 선구(vorlaufen)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앞서 달려간다' 이런 표현을 쓴다. 죽음이 아직 닥쳐오진 않았지만 죽음을 미리 생각하면서 자신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가능성이 뭔가를 깨닫는 것이 "죽음에로의 선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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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이 죽음에로의 선구, 죽음을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 이것은 단순히 머리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되고 불안이라는 기분 속에서, 불안이라는 기운이 엄습된 상태에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해야 된다고 본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무상함, 덧없음을 느끼고 그러면서 허무감 등에 사로 잡히는데, 그런 것을 하이데거는 "불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안과는 많이 다른 개념이 아닌 삶에 대한 무상감, 허무감인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이런 무상감, 허무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항상 죽음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이 무상감은 항상 우리 내면에서, 우리 삶의 근처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억누르고 있다.
그런데 불시에 그런 무상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일상생활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없이 삶의 무상감이 덥쳐올 때가 있다. 그건 다시 말하면 불안감이,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항상 임박해 있다, 삶의 근저에 항상 불안이 존재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무상감, 허무감, 이런 것들이 일차적으로는 상당히 괴로운 기분인데 그런 것을 통과할 때, 세상 사람들의 가치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릴 때, 그때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새롭게 봤던 것처럼 세계와 사물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고 세계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와 성스러움, 거기에 대한 경의와 기쁨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정리하면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본래적인 실존은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말고 그것을 인수하여 세상 사람들의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경이와 기쁨 속에서 세계와 사물을 경험하는 그런 식의 삶의 상태이다.

즉,
죽음에로 전구하면서, 자신의 본래적 가치를 인수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이해한다.

죽음에로 전구하고 본래적 가치를 인수한다는 것은 현존재의 장래성, 미래성, 미래적 시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은 과거와의 관계와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가 완전히 달리 전개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현재를 '순간(Augenblick)'이다, 우리의 눈이 완전히 새롭게 떠져서 이 세계와 사물이 달리 나타나는 그런 식의 순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의 시간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는 시간성이고 시간적인 존재'라고 할 때는 이런 식의 사태를 가르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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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이렇게 죽음으로 전구하면서 순간 속에서 세계와 사물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을 하게 될 때, 그때 존재 전체가 열린다고 보는 것이다.

전통철학에서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존재자들의 근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이라든가 이데아라든가 이런 근거도 상당히 존재자처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런 존재자들의 근거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이론적인 이성, 이것에 의해서 파악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가 드러나는, 가장 포괄적인 열린 장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사물을 어떤 관점에서 본다. 특히 개인적인,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좋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보통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다. 조금 더 멀리 나가면 가족의 관점, 더 멀리 가면 국가, 민족의 관점, 더 멀리 나가서 보면 인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 이런 것은 인류에게 좋은거고, 자연을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인류 관점에서 자연을 관찰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인류의 관점까지도 완전히 벗어나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연 자체의 관점, 하이데거가 그리스인들의 용어를 사용해 말한 퓌지스(physis)의 관점에 들어가는 것이 죽음에로 전구하여 세상 사람들의 가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자연은 특별한 존재자를 차별하거나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런 가장 포괄적인 장, 가장 포괄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고찰할 때, 사물은 성스럽게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문명의 가장 큰 문제점을 성스러움이 사라져 버렸다고 얘기하기도 하였다.)

전통철학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현존재의 이런 실존적인 수행, 실존적인 변혁을 통해서만 존재 자체가 개시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이다.







댓글 2개:

  1. 죽음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인용된 책이나 사이트가 있다면, 출처를 명기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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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용이라기 보단...박찬국 교수의 강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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