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 사상은 인간을 "역사적인 존재"로, 후기 사상은 "존재사적 사유"라고 얘기한다.
전기의 하이데거는 인간을 역사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렇지만 정작 자기 철학적인 사유는 역사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불안이라는 기분을 이야기 했는데 <존재와 시간>에서는 그 불안이라는 기분을 상당히 통시대적인, 어떤 시대에서든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전기 하이데거는 전통 철학을 비판하고 있지만 플라톤이든 칸트든 니체든 이들의 철학에 이미 하이데가 자신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들이 상당히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의 철학은 먼저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전통적인 여러가지 개념틀이나 사고틀에 구속되어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니체는 하이데거가 상당히 많은 동질성을 느꼈던 사상가이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 마지막의 역사성을 분석하는 부분에서는 니체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을 아주 분명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후기로 와서는 그런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다. 니체를 포함하여 칸트, 플라톤 이런 사람들은 서로 간에, 또 하이데거 자신과도 완전히 다른 사유의 내용을 갖는, 패러다임이 다른, 서로 간에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전기의 하이데거는 이 세상이 저 세상보다 우월하다거나, 내가 저 사상을 완성하고 있다거나, 자기가 칸트를 완성하고 니체를 완성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그렇게 이해 할 수 없으며 다 위대한 철학자로, 각자 자기 시대에 나타난, 자기 시대에 개시된 그 존재를 개념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사상가들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이런 "존재의 이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상이 다른 것이고 그렇게 다를 뿐 어떤 것이 더 우월하다는 식은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 이해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하면,
서양의 중세의 경우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의 피조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사물이 존재는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하고 또 다른 에너지로 얼마든지 변환가능한 고유한 본질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시대에 따라 존재 이해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모든 존재 이해가 다 좋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에 빠졌던 것은 아니다. 뭔가 더 근원적인 존재 이해가 있는데, 그것을 자기가 그 근원적인 존재 이해를 얘기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니체나 그 전의 사상가보다 자신이 뛰어난 사상가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어쩌다 보니까 자기 시대에 지금 존재가 근원적인 방식으로 개시하고 있으니 내가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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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하이데거는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 그래서 존재가 마치 하나의 신처럼 실체화 것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말은 우리가 '기분'이라는 개념을 끌어드리면 조금 더 쉽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정신과 시간>에서 많이 언급된 "불안"이라는 기분에서 보면,
우리가 허무감, 무상감이라는 그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전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면서 세계 전체가 다르게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렇게 세계가 나타나고 그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는, 불안을 겪은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과학적인 탐구보다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세계 전체가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는 이렇다'라고 드러날 때의 그러한 기분을 "근본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즉, 존재는 근본기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근본기분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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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인들한테 존재가 경이라는 기운 속에서 근원적으로 개시되었다고 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경이라는 근본기분 속에서 존재를 경험했다고 본 것이다.
'경이'라는 기분을 보통의 '놀람'은 구분된다. 평범한 가운데 뭔가 특출난 존재가 눈에 띄면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놀라게 된다. 그런데 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장 진부하게 넘겼던 것들이 경이롭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진부한 것들이 경이롭게 나타난다는 것은 모든 것들이 경이롭게 나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상태가 '경이'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존재자들이 각자의 고유한 존재와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보는 것이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은 각 존재자들이 자기들의 진리, 존재, 이런 것이 다 드러나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세계를 경험을 했다는 것이고 그런 세계 속에서 경이와 아울러서 친숙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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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대가 가면서 경이의 기분이 약화돼가고 그러면서 기존의 세계가 낯설게,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세계에 던져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게되고 그러다 보니까 어떤 삶의 확실한 지반 같은 것을 얻고 싶어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신이다.
신이 우리에게 삶의 확실한 기반을 제공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한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 중세인데, 각 존재자들은 신이 만든 것이어서 우리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느정도의 신성이 있고 인간은 신의 뜻을 받든 관리자이지 그 존재자들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중세 시대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경이가 조금은 남아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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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와서는 경이라는 기분이 완전히 상실 돼버린다. 그러면서 인간이 자기의 이성의 힘으로 확실한 삶을 토대를 찾으려고 한다. 자연과학이라든가, 기술의 개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해 나가려 한다. 끊임없이 이성을 발달시키고 그 이성을 통해서 자연을 극복해나가고 사회를 인간의 뜻에 맞게 잘 개혁해나가고 관리해 나가는 그런 식의 시대이다. 그래서 근대는 하나의 진보의 시대이다.
그리고 근대는 결국 현대 기술 문명의 존재 이해로 귀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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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술 문명의 존재 이해는 위에서 말했듯, 모든 존재자들이 계산 가능하고 전환 가능한 에너지로 보는 존재 이해이다.
"현대 기술에서 지배하고 있는 탈은폐의 방식은 일종의 닦달이다" 라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이 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내놓도록 계속 닦달하고 추구하고 몰아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대지와 대기권이 완전히 다 버려진(자연이 가지는 어떤 관념적 성격이 다 제거된) 단순한 원자제가 되는 것이고, 인간도 단순히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로 간주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에너지는 다른 사물들이 가지는 에너지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인간의 에너지는 다른 사물이 가지는 에너지를 캐내고 발굴하는 그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문명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지배에의 의지"라고 본다. 오늘날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자연에 대한 지배를 통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지배의지가 하나의 광기처럼 현대인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현대의 지도자에서 히틀러라든가, 스탈린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지배의지라는 광기의 노예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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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술 문명을 정초하는 철학자로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바라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니체는 현대 기술 문명,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자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 사람이다고 이해하되는데 하이데거가 보기에 오히려 니체는 현대 문명의 완성자고 현대 기술 문명을 철학적으로 정초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현대 기술 문명에서는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 규범, 이런 것들도 다 우리 인간들의 생존이나 힘의 강화를 위한 수단, 도구적으로 본다. 그래서 그런 추구하는 것에 도움이 안 되면 다 교체할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런 식의 철학을 니체가 19세기에 이미 적립했다른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보고 있다.
고향 상실의 시대 :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
* 신들이 떠나버렸다는 것은 어려운 얘기이다. 하이데거의 신 개념은 휠덜린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며, "옛 신은 떠나가고 아직 와야할 신은 오지 않은 시대다."라는 휠덜린의 말을 하이데거가 인용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말대로 중세의 기독교적인 신은 이미 죽었다고 보고있다. 시대적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신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하이데거의 신 개념은 매우 애매하고 난해한 부분이다.
인간과 모든 사물들을 단순히 계산가능하고 전환 가능한 에너지로 보는 이런 존재 이해, 이런것 때문에 제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고 히틀러의 만행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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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에서 불안을 본래적 실존으로 도약하고 전화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기분으로 봤는데, 후기에서는 불안이라는 기분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경악'이라는 기분을 보통 이야기 한다.
"경악"은 존재자들에게서 존재가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그런 식의 기분이다. 그동안 집착했던 가치와 가술적인 사물들이 사실은 다 헛되고 무상한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소중히 하고 그랬던 것들에게 사실은 고유한 존재의 무게가 전혀 없구나를 깨닫고 경악하는 것으로 불안과 상당히 유사한 기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런 기술적인 사물들에 대한 추구와 집착을 완전히 버릴 때, 그럴때 경악이라는 기분이 "경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 후기 용어 중에 "방념(gelassenheit)" 이라는 표현이 있다. '있게 하라', '그대로 둬라' 이런 식의 이야기인데, (동양 철학의 경우 노자의 무위 사상과 상당히 통하는 면이 있다) 존재자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이런 의지, 지배의지를 버리는 것이고 그럴때 우리가 경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힐 수 있고 그래서 '열린 터(das offene)'라는 곳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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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시어와 정보언어를 구별한다.
시어는 존재자들의 신비스러운 현존을 드러내고 존재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는다. 정보언어는 존재자들을 인간의 뜻대로 사용하고 처리할 수 있는 지식을 준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은 시 속에서 도 존재하게 된다', '존재자들에게서 빠져나갔던 존재가 다시 존재자 안에 깃들게 된다', 이런 표현을 썼다.
즉, 정보언어의 과학기술적 태도 속에서 존재자들을 지배하려 하면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리는, 은폐되고 은닉해버리는데, 시 속에서 그런 지배 의지를 다 버리고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존재의 열린 터에 우리를 다 내 맡길 때, 그때 이제 빠져나갔던 존재가 다시 존재자 안에 깃들게 되고 우리는 그 존재자들에게서 신비스러운 현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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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의 근원>에서 하이데거는 몇 가지 작품을 예로 하여 자신의 사상과 예술에 대한 분석을 전개 하고 있다.
구두 - 반 고흐
농부 아낙네의 구두라고 생각하면서 분석하였는데 사실은 반 고흐의 구두였다. 그래서 애초에 잘못된 사실을 가지고 분석한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느냐, 그런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런 논란이 많다. 어쨌든 하이데거의 분석은 아주 매력적이다.
닳아빠진 구두 내부의 어둠 속에서부터 들일을 나서는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구두 안에는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한없이 멀고 한없이 단조로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다.
구두 가죽위에는 대지의 축축함과 비옥함이 누워있다. 구두창 밑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들판 길의 고독이 납작하게 눌러져 있다. 구두 안에서는 대지의 말없는 부름, 익어가는 곡식의 조용한 선물, 바람 부는 텅 빈 밭의 황량함이 보여 주는 알 수 없는 자기 거부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유년기부터 가져놀던 인형, 오래찬 자전거나 자동차 등, 우리는 오랜기간 사용한 도구에 대해 어떠한 정을 느낀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의 본질을 '신뢰성'이라고 표현하는데 한국말로 더 잘 번역하면 '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든 오래된 자전거를 이용할 때 마음이 편안하고 익숙하고, 자전거를 통해 다녔던 동네의 풍경들이 그 자전거 속에 하나의 세계로서 깃들여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그림의 구두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그런 정이 깃든, 농부 아낙네의 삶의 세계와 대지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 아낙네에게 이 구두는 단순히 쓰다가 낡아빠져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안정된 삶의 세계를 확보해주는, 대지와의 친숙함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구두의 본질을 반 고흐가 그림으로 드러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본질이라고 하면 사물들에게 공통된 어떤 특성을 생각하는데, 하이데거는 예술가들이 드러내는 본질이나 사물의 진리는 그런것이 아닌 사물들에게 포함되어 있는 세계와 대지를 함께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술 문명은 과학이야말로 사물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지만 하이데거는 사물의 진리는 예술을 통해서, 시인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본다.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사물과 세계를 경험할 때 사물의 진리가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신전을 묘사할 때 "그리스 신전은 아무런 대상도 모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서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경우 예술이란 감각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단순한 모사가 아닌 사물에 깃들어 있는 고유한 존재와 세계, 대지를 함께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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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말하는 "세계"와 "대지"는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길항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는 사물과 대지에 뚜렷한 형태를 부여하려 하지만, 이에 반해서 대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은닉, 은폐하려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세계와 대지 사이에 일종의 사랑의 투쟁같은 것이 일어나게 된다라는 것이다.
니체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아폴론이 뚜렷한 형태, 절도, 질서를 이야기한다면 디오니소스는 도취적인 합일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하이데거의 세계와 대지가 유사한 관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조금 더 후기로 넘어가면 세계와 대지가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세계를 대지까지 포함하여, 대지와 하늘 그리고 인간과 신을 포함하는 보다 더 포괄적은 것으로 생각한다.
사방(사역, Geviert) : 하늘과 대지, 신적인 자와 죽을 자, 이 네 가지를 포괄하는 세계
하늘은 우리를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탄하게 하면서 좋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대지는 어머니로써 모든 것을 떠받치고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다.
신의 개념은 애매모호하지만, 현대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이 세계 주인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서 신(기독교적 신의 개념은 아님)의 비호 아래에서 세계와 사물이 성스러움을 가지고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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