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의 자연은 특히 인체이며 모방을 하되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최대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끌여올리는 것이 고전예술의 원리이다.
가령,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조각을 만들 때 한 사람만을 모델로 하지 않고 여러 아름다운 사람들을 모델로 해서 각각의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취해서 완전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려했다. 현실을 모방하되 이상적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그리스 예술은 인간에서 신으로 도달하려는 중간에 있게 된다. 인간의 신체를 예술을 통해서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경지까지 끌어올렸을 때, 그 조각상은 신의 몸(신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예술은 단지 예술작품이 아니라 신을 닮으려고 했던 그리스 예술가들의 존재미학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이루어진다. 현대 예술에서 묘사된 인간의 모습에는 더이상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이 없다.
빙켈만에 의해서 탄생하였고 괴테, 쉴러에게 받아들여진 후 19세기까지 독일을 지배했던 고전주의라는 예술원리, 그러한 문화적 전통에 익숙하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현대예술은 못마땅한 것이었다.
한스 제들마이어는 대표적인 미적 보수주의자이다. 고전미학에서 '신을 닮은 인간의 이상'이라는 이념이 현대에 와서 사라졌는데, 이것을 한스 제들마이어는 "중심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고전미학의 정신이 예술의 본질이고 중심인데 현대예술은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현대예술은 퇴폐예술이다'라고 까지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현대예술에서는 인간이 신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아래로 추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비너스의 탄생 - 산드로 보티첼리, 1486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여신 비너스를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년 3월 1일 ~ 1510년 5월 17일)
: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보티첼리(=작은 술통)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문과 그 가문의 추종자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의 초상화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재능은 본질적으로 다른, 고딕적 전통과 시에나 파의 양식과의 결합에 있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적 수법에서 벗어나, 상징과 장식을 강조하여 시적 세계를 이룩한 그의 대표작이다.
아비뇽의 처녀들 습작 - 피카소, 1907
아비뇽의 처녀들은 창부를 묘사한 것이다. 고전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현대미술은 인간에서 신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소위 천박한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몸의 아름다움도 그만큼 추해진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 삼미신(The three Graces, 1924-25)
삼미신이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
*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출생, 사망. 젊어서 인상파풍의 풍경화로 주목되어 포비즘, 큐비즘, 오르피즘의 화풍으로 차례로 변해가면서, 1910년 마르셀 뒤샹과 만나게 됨으로써 결정적인 ‘반(反) 예술’의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1913년의 미국 여행 이후 난센스하고 성적인 『기계』의 시리즈를 그리고, 뒤샹과 ‘뉴욕 다다’의 운동을 일으킨다. 기행과 부르주아적 생활에 젖으면서도 그의 본질은 철저한 아나키즘에 뿌리박고 있으며 작풍의 어지러우리 만큼의 변화도 여기에 기인한다. 대표작은 『카뷰레터 어린이』(1919,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남프랑스 해안』(1928년경, 뉴헤븐, 예일 대학미술관) 등이 있다.
보티첼리의 삼미신 : Primavera - Sandro Botticelli, 1482
르네상스의 대표 작품인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에서의 삼미신으로 우아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마찬가지로 피카비아의 삼미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현대예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라서 지성을 가진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현대예술에는 거꾸로 표현된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vwer), 1946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같이 보인다. 이것이 현대판 아담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가능한한 못그릴려고 애를 쓰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형상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이 그린 그림처럼 나타나고 인간의 형상이 마치 유아로 퇴행한 듯한 느낌을 준다.
* 장 뒤뷔페 (Jean Dubuffet, 1901~1985)
프랑스 화가, 조각가. 41세까지 가업인 포도주업에 종사 후 회화에 전념함. 살롱적 미술을 부정하고, 미친사람, 영매(靈妹) 등을 그리며 앵포르멜의 원류를 형성했다. '생의 예술(L’art brut)'의 이론적 선구자로, 인간성을 상실한 ‘문화적 예술’을 비판했다. 1966년 이후는 조각 또는 오브제 제작에도 손을 댄다. 대표작으로는 『겨울 정원』이 있다. 또한, 주류 문화를 강력히 비판한 『숨막히는 문화』(1968)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다.
윌렘 드 쿠닝 - 여인1(Woman 1), 1952
쿠닝의 여인 누드화이다. 아름답고 추하고를 넘어, 형태마저도 해체되어어 사라져버린 느낌이 든다. 모더니즘 예술에 와서는 이렇게 해체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추상표현주의의 화가로 구상도, 추상도 할 수없는 표현과 격렬한 필촉이 특색이다. 드 쿠닝은 잭슨 폴락과 대등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작가이고,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예술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살바도르 달리 - 트리스탄고 이졸데(Tristan and Isolde), 1944
초현실주의에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성이라는 것은 본능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진짜 인간의 모습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존재하고 정신이 아닌 Libido라고 하는 성적인 욕구에 있다. 의식, 정신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껍질에 불과하다. 살바도르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인간이 가지는 동물적 본능, 리비도와 같은 성적인 에너지들이 나타나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에서는 종종 인간의 신체가 동물과 하나가 된 체로 나타난다.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침팬지의 입으로 묘사하거나 여인의 초상에서 멧돼지의 긴 어금니를 그리기도 하고 투우사와 소를 표현하면서 둘을 한 몸이 된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점이 뭐냐라고 하면 동물에게는 정신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정신, 합리성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베이컨이 주목한 것은 정신을 가지기 전의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한마리의 동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신체를 표현할 때 종종 동물인지 인간이지 구분되지 않는 고깃덩어리를 그리곤 하였다.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1904 ~ 1989)
: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설에 공명, 의식 속의 꿈이나 환상의 세계를 자상하게 표현했다.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 ~ 1992)
: 아일랜드 태생 영국 화가로, 대담성과 소박함, 강렬함과 원초적인 감정을 담은 화풍으로 잘 알려져있다. 베이컨 특유의 화풍은 대개 특징 없는 단색의 배경 위에 추상적인 형상이 유리나 기하학적인 철창에 갇혀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고대에는 인간에서 이상적 인간을 표현하고 정신적으로 신을 향해 올라가려고 했던반면, 현대 미술에서는 유아로 돌아가고 심리적인 동물적 본능으로 돌아갔다가 몸 자체마저도 동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해체를 향해서 더 나아간다.
Giorgio de Chirico - Hector and Andromache. 1912
키리코의 작품이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라는 남녀의 모습인데 인간의 신체가 유기물이 아닌 로봇같은 무기물로 표현되었다. 진화의 순서가 뒤집혀서 인체가 동물화되고 무기물화까지 진행되고 있다.
* 조르조 데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1888 ~ 1978)
: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회화(피투라 메타피지카)의 대표적 인물로 여겨진다. 형이상학적 회화는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초기 단계중 하나이다. 그리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테네 미술 학교, 뮌헨 예술원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 후 파리로 건너가 1911년부터 큐비즘(물체의 모양을 기하학적으로 점과 선으로 나타내려는 파)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개척자로서도 공이 크며, 현대 이탈리아 미술의 선구자이다.
Marcel Duchamp-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2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 2)
뒤샹의 그림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연속동작을 촬영한 것 처럼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가 마치 로봇처럼 묘사되고 있다.
* 아헨리 로베트 마셀 뒤샹 (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 ~ 1968)
: 프랑스의 예술가로, 다다이즘 과 초현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195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뒤샹의 작품과 아이디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근대 미술 수집가에게 한 조언은 수집가들이 서양 미술 세계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모더니스트들, 특히 미래파의 경우 인간 신체의 금속화를 꿈꾸었다. 실제로 산업화가 되고 현대화가 될수록 인간의 신체는 기계와 섞이고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흐름을 예견하고 긍정했던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의해 인간의 몸은 종종 금속성, 기계화를 보인다.
Raoul Hausmann - Mechanical Head (The Spirit of Our Time), 1920
라울 하우스만의 작품, 기계적인 머리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계와 조우하고 미디어 속에서 살아가는 환경을 예감하였고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1886~1971)
: 오스트리아 태생의 다다이즘 예술가. 1918년 조지 그로스, 존 하트필드 등과 함께 베를린 다다를 결성하였으며, 정치적이고 풍자적인 성향을 띤 포토몽타주 기법을 창안하였다.
프로이트 철학에서 한번 정리해보면,
점점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존재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은 에로스적 충동이다. (에로스 : 자연의 퍼올리는, 생명을 산출하는, 생식의 힘) 그 반대는 타나토스적 충동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점차 의식, 정신이 성장하고 몸도 성장하다. 그러다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몸이 쇠약해지고 죽고나면 모든게 해체되고 대자연으 품 속으로 합류된다.
에로스적 힘과 타나토스적 힘은 이렇게 순화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에로스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신을 추구한, 에로스의 충동을 구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근현대 화가들은 거꾸로 파괴와 죽음의 힘, 추락하는 타나토스적 충동을 구현한다.
그렇기에 한스 제들마이어같은 보수족 미학자에게 현대예술은 퇴폐였고,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을 entartete kunst 라고 명했다. entartete는 퇴폐라는 뜻이고 동시에 퇴화화 되어있음을 의미한다. 한스 제들마이어가 현대예술에서 이러한 퇴화의 경향을 읽은 것은 아주 정확한 것이다. 다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견해를 가져서 현대예술에 과도한 적대감을 나타내기에 납득하기가 힘든 지점이 있다.
entartete kunst는 나치정권 하에서 현대예술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나치정권에서는 두가지 전시회가 있었다. 하나는 퇴폐예술전으로 피카소를 비롯한 오늘날의 현대예술가 작품들을 압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조롱하도록 전시회를 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대독일전이라고 하여 나치예술을 전시했다.
인간이지만 신을 닮아있는 나치영웅들을 묘사하는 나치예술은 보수적인 미적견해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 영웅상들은 인문학적 바탕이 있지만 나치예술은 정치적일 뿐이다. 이처럼 현대에서 고전적인 인간상을 부활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오용되기가 쉽고 전체주의 예술, 선전선동 예술화 될 수 있다.
즉, 고전주의적 관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예술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오용되지 않고 실제로 옛날처럼 작업한다고 하여도 그 결과는 크게 훌륭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키치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미술학원에서나 교육적 목적으로 고대모방론을 적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고대그리스인들과 같이 작업을 하게 되면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가로 평가받게 된다. 빙켈만에게 아름다움은 고대미술에 있었다. 그리고 예술은 새로운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 관련있었다. 그렇기에 고대미술을 모방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고대를 모방하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가 되는 것이다.
현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움이다. 낡은 취향, 보수적인 취향, 대중에게 아주 일반화된 취향에 영합하는 몰취향은 거부하고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를 추구한다.
아스거 요른 - 중심의 상실, 1958
이 작품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한스 제들마이어의 저서와 같은 '중심의 상실'인데, 작가인 아스거 요른이 패러디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스 제들마이어의 미적 보수성을 풍자하는 예술적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아스거 요른(Asger Jorn, 1914~1973)
: 본명 아스거 올루프 요르겐센(Asger Oluf Jorgensen). 덴마크의 화가. 프랑스 모더니즘 아트로 분류되며 짙고 선명한 색채에 의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특색으로 한다.
중심의 상실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중심이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인간의 상,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미적 이상만은 아닐 것이다. 중심의 상실은 예술 자체의 성격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요한 시대마다 주요한 예술적 과제가 있었다. 중세에는 교회건축과 직결되는 등, 전체적은 context(맥락) 안에서 그림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요즘은 그림이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미술관에 걸린다. 이것은 현대의 자율적 독립적 인간상을 닮았다. 옛날의 인간은 공동체에 살았다. 공동체는 가치관을 공유한다. 반면 현대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공통의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고 이것이 중심의 상실인 것이다.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옛날 예술과 같이 시대의 주요한 예술적 과업을 설정해야 되다는 것인데, 그러면 옛날처럼 종합예술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중세의 교회, 근대의 왕궁 등) 오늘날에 그런식의 종합예술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런 종합예술이 이루어진 것은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시대이거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이다. 19세기까지 문화적인 현상이었고 타당했던 예술이념과 예술과업들을 오늘날 다시 부활하라고 할 때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