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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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니히 니체 (1844~1900)
1. 현대성과 현대정신으로의 전환점
2. 철학의 플라톤주의를 전복한 철학적 다이너마이트
3. 서양의 전통 자명성 일체를 파괴하는 망치의 철학자

=>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

존재의 필연성과 존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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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스스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자화자찬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큰,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최고의 책 (중략) 가장 심오한 책으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했다.

- 이사람을 보라, 서문 -


이 책은 다벗 번째 복음서이며 (중략)
미래의 성서가 될 것입니다.

- 서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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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핵심사유 힘에의 의지, 신의 죽음, 위버멘쉬, 영원회귀 등이 한데 얽혀서 가치전도라고 하는 철학적인 모험을 시도 한 책이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것이라고, 정의라고,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과 신념과 사유체계의 토대이자 근간이라고 확실하게 믿어왔던 그 모든 것들은 다 틀렸고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그 대신 새로운 내용들을 제시한다.

또한 초월자 없는 현세에서,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 미래의 인간을 약속해 준다. 니체는 이러한 미래의 인간은 디오니소스적 긍적의 주체이고 동시에 위버멘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라는 개념이 최고의 현실이 되었다. (중략)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내 개념이 최고의 행위가 되었다.
괴테나 셰익스피어도 이런 거대한 열정과 높이에서는
한 순간도 숨을 쉬지 못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비하면 단테도 한갓 신봉자에 불과하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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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특별한 부제를 가지고 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당대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래서 책이 당대에 받을 혹평, 그 운명을 을 염두해 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중략) 언젠가는 내가 이해하는 삶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살도록하고 가르치게 될 기관들이 필요할 것이다;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를 해석해내는 일을 하는 교수직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내 진리를 위한 귀와 손들을 벌써 기대한다면, 그것은 나와는 완전히 모순된 것이리라. 오늘날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않는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이 내게서 뭔가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엔 정당하기까지 하다. (중략) 백년만 기다려보자. 그때까지는 인간을 탁월하게 이해하는 천재가 나타나 니체라는 이를 무덤에서 발굴할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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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사유가 영원회귀라고 말했다. 이 책은 영원회귀 사유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허나, 영원회귀사항이 중심인 것은 분명하다.
책은 신의 죽음,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극복, 위버멘쉬, 가치의 전도와 같은 니체의 핵심사유들이 전부 모여서 긍정의 철학을 보여주는데, 영원회귀 덕분에 각각의 사유가 파편화되어 흩뿌려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형태로 하나의 거대한, 비가시적인 일종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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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를 중요시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위버멘쉬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위버멘쉬요,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서설> 7> -

위버멘쉬 : 건강한 인간의 대명사 :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주체

위버멘쉬의 개념은 차라투스트라에서만 등장하고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이사람을 보라 등 다른 책에서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다른 개념들로  등장한다. (차라투스트라에서는 좀더 고급한 인간, 좀더 높은 인간, 강자, 주인의 개념이고, 복합개념으로서 창조자, 신체의 주인, 자유정신, 주권적 개인 등의 의미를 차용한다.)

위버멘쉬에 대해 고찰해 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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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버멘쉬는 인간존재의 의미, 실존적 과제이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인간 실존의 과제, 인간 존재의 의미로 제시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위버멘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철학 전체를 사람들을 위버멘쉬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기획했다고 자기평가를 하기도 했다. 일종의 교육 철학적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서설>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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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버멘쉬는 대지의 뜻이다.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이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맹세코 대지에 충실하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서설> 3 -

신의 뜻도 아니고 초월세계의 뜻도 아닌,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이 대지, 지상이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마지막 의지가 되기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 

정오는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점. 허상이 가장 짧은 때이다. 신과 모든 우상이 사라지고 위버멘쉬가 이를 대신할 것이다. 서양 철학의 플라톤 주의는 끝났다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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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명제 = 플라톤주의의 끝

1. 철학적 의미 :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파괴, 전통적 자명성의 전복
2. 종교적 의미 : 그리스교도 신 부정, 예수를 통한 그리스도교성 회복
3. 도덕적 의미 : 그리스도교 도덕 비판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다.

- 선악의 저편 -


형이상학적 이분법
: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으로 이원화하고, 전자에 후자에 대한 존재적-인식적-가치적 우위를 부여하는 사유방식

- 존재 : 근원태, 참된 세계, episteme, 있어야 하는 세계
- 생성 : 파생태, 가상 세계, doxa, 없어도 되는 세계

존재는 이데아의 세계이고 우리 세계의 존재 근거이다. 이데아에 근거하여 생성되는 현상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다.  이것이 종교철학으로 들어가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로 이분화 되면서 그 형식이 그대로 유지된다.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구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철저히 분리되서 고찰된다. 니체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그리스도교의 성에 충실한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자. 최후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평가한다. 역사상 그리스도교인은 단 한사람이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한다.(니체의 저서 <안티크라이스트>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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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짜라고 말하고 부정의 대상이며 그 가치를 폄하한다. 니체는 그에 반발하여 우리가 발 붙이고 살아가는 현상 세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담아서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라 말하고 이 세계를 긍정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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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버멘쉬는 신체(Lieb)라는 유기체이다.

그런데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도 기존의 사유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존재이다.

기존의 개념에서,  인간에게 있어 '나 자신'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정신성, 즉 이성이었다. 니체는 더이상 그러한 사유방식을 갖지말라고 말한다. 니체는 신체(Lieb)라는 유기체를 이성과 육체와 의지의 불가분적인 통일체이자 복합체로 이해한다. 이것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가 나 자신을 구성한다.

이성작용과 감각 작용 및 육체의 실천 그리고 의지가 불가분적으로 교류하면서 만들어 내는 것이 나인데, 니체에게 있어서 의지는 단순한 의지가 아닌 힘에의 의지이다. 힘에의 의지는 이성작용과 감각활동 모든 것을 규제하는 규제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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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는 니체 철학의 유일한 설명원리로 니체 철학 전체를 방법적 일원론으로 만드는 개념이다.
인간, 자연, 종교, 우주 등 모든 행동, 행위양식을 힘에의 의지로 설명하려한다. 그래서 총체적 환원주의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 까지 하나의 통 속에 넣고 설명하려하면 억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힘에의 의지 개념은 마키아벨리 권력개념,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 자연철학 및 자연과학의 힘 개념 등을 받아드리고 조합하여 이루어 진 것이다. 이 개념은 복합개념이고 미완결 개념이지만 이것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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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버멘쉬는 힘에의 의지의 주체이다 : 자기극복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다. 그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너희 역시 힘헤의 의지다. 그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유고 -

힘에의 의지를 굳이 가장 니체적으로 정의내린다면 ,
(의지가 있고 힘에의 의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힘 상승과 강하, 지배를 추구하는 의지작용이다. 힘에의 의지 = 상승적 삶의 의지 = 생명의지

인간은 자기 내부에 있는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생명을 발견하는 곳에서 나,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생략)
보라, 나 끊음없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자기극복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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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버멘쉬는 자유의지, 그 창조의 주체이다.

위버멘쉬는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자유정신은 말 그대로 자유로워진 정신을 뜻한다. 자기 어깨를 짓누르는 짐으로 부터 그리고 자신의 삶을 구속했던 모든 것, 기존의 도덕적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정신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것에 대해서 부정하고 왜 내가 따라야하는지 물어보면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왜냐고 물어보기만하고 거기서 그치고 만다면 진정한 자유정신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한다.

자기극복적인 삶, 나의 위버멘쉬적인 삶을 위해서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한다. 내 안의 힘에의 의지가 창조 의지로 발현되서 나의 상승적 삶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설정하고 그 가치를 따라야 한다.

부정과 파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창조의 상태로까지 나아갔을 때가 자유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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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버멘쉬는 주인적 삶, 삶의 의미와 가치의 척도의 주인이다.

이러한 자유정신을 니체는 주인적 삶을 사는 정신이라고도 말한다. 위버멘쉬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너희들이 세계라고 불러온 것,
그것도 너희들에 의해 먼저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가 너희들의 이성, 너희들의 이미지,
너희들의 사랑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정 너희들이 지복을 누리도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지복의 섬에서> -

그래서 위버멘쉬는 스스로를 분만하는 예술가, 삶의 예술가로 만드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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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 사자 -어린아이'의 비유

짐깨나 지는 정신 (중략) 짐을 가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다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중략)
사막에서 사자로 변한다.
정신은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고자 한다. (중략)
그러나 말해보라, 형제들이여.
사자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어린아이가 해 낼 수 있겠는가? 

(중략)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요구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기 세상을 되찾는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세 변화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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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위버멘쉬는 관계적 실존, 관계세계를 형성한다.

자기가 힘에의 의지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힘에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이다.
힘에의 세계는 하나로 있지 않다. 나는 내 안에 수없이 많은 힘을 추구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매순간 새롭고 다른 의지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타인들도, 나아가 이 세계 만물 전체가 각자의 의지를 가진다. 힘에의 의지는 다수로 존재한다. 이 의지들은 서로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서로 얽혀서 관계맺고 있다. 그래서 이 힘에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힘에의 의지는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여기서 하나의 중심을 말할 수 없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디오니소스적 긍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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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의 의지들은 항상 상승과 강화와 지배를 추구하는 의지이다. 좀 더 힘이 세져서 다른 힘에의 의지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힘겨루기 관계가 형성된다. 따라서 관계의 세계는 힘싸움의 관계의 세계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힘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이 노력과 경향성은 다른 힘에의 의지들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경쟁자가 훌륭하면 나를 발전시키려는 욕구가 더 커지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고 고무시키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가 더큰 힘에의 의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적을 갖되,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경멸스러운 적은 갖지 말도록 하라.
너희들은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만 한다.
: 그렇게 되면 적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 될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싸움과 전사에 대하여> - 

진정한 적이 곧 진정한 벗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서로 다른 힘에의 의지의 상승운동은 서로 시간적 선후관계, 인과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힘 싸움과 긴장관계는 동시적으로 일어나므로 원인으로서의 의지와 결과로서의 의지는 구분되지 않고(이원화 할 수 없고), 일방향적인 운동이 아닌 쌍방향적인 운동이다.

힘싸움의 함의는 관계체로서의 나와 세계가 존재하고 A와 B의 긴장은 창조적 힘을 이끌어 내며 서로의 상승운동으로 인한 win-win관계를 만들어낸다.
=> 상대 존재에 대한 인정 & 존재 전체에 대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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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디오니소스적 긍정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와 필연성을 확보하였다. 모든 것은 중요하고 의미있다.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서 빼 버려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나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시인하고 '그렇다'라며 웃어주는 번개를 잉태한 채,
예언자적 번개불을 내려칠 태세를 하고 있다면...
그처럼 배불러 있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 (중략)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말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면,
오 내 어찌 영원을 (중략) 열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일곱개의 봉인, 또는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 -

=> 영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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