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칸트 -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교수 강의.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 내용.

철학서는 라틴어로 쓰여지고 있었는데, 순수비판이성은 최초의 독일어로 쓰인 철학서이다.
그런데 그 독일어는 200년 전의 독일어이며 그것은 처음으로 라틴어로서의 철학용어를 독일어화 한 것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칸트는 이 책을 6년 후 재판을 냈는데 이 책이 6년간 독일 학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우리에게 여실히 잘 보여준다.

칸트는 책이 나오면 독일 지성계가 발칵 뒤집힐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누구도 읽었다는 말이 없었다. 겨우 1년 후에 서평이 나왔는데 그것이 전혀 제대로 읽은 내용이 아니었고, 칸트가 이에 분개해서 2년 후 순수이성비판을 다른 방식으로 정리해서 내놓은 책이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 형이상학 서설)] 이다. 순수이성비판이 당시에도 얼마나 해독하기 어려웠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다가 칸트가 6년 후 재판을 냈는데 특기할 만한일이, 그 개정판을 내면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대혁신] 책의 머리말을 경구로 인용하였는데 이것이 칸트가 왜 순수이성비판을 저술하였는가 하는 그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칸트는 사람들이 진리를 밝히는 도정에서 부딪히는 끝없는 착오들을 종결짓고 그것에 합당한 한계를 제시하는 일, 그것이 이 책을 쓴 동기 중의 하나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복지와 존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하는 내용을 언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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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미치는 것의 너머 있는 것에 대한 탐구인데 칸트는 인간은 감각 너머 있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순수비판이성을 통해서 정리한다. 그런 측면에서 종래 의미의 형이상학은 학문이 아니라고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며 순수이성비판은 반형이상학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종래의 철학은 부실한 토대 위에 있는 가건물 같은 것이다. 형이상학이나 도덕론이나 종교론이 다 일종의 사상누각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줘야 되겠다는 것이 칸트의 작업 요지인데 그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이 이른바 이성비판이다.


인간 이성의 최종 목적들에 대한 학문, 철학의 세계시민적 개념이 칸트가 지향하는 철학이었고 결국 최종 목적에 대한 분별력을 길러야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갓 논리적인 숙련성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이 인류 복지에 어떤 유용성이 있느냐 하는 것을 늘 염두해 둬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순수비판이성을 저술 했는데, 그런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서 칸트가 펼친것이 계몽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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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는 계몽주의 시대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던 것은 오늘날 개념으로 자연과학에서의 계몽주의의 모습이고 로크, 루소, 볼테르에 의한 것은 정치 사회 문제에 있어서의 계몽주의이고 칸트는 그 계몽주의를 형이상학에서 실현했다.
계몽이란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일깨우는 것. 무지몽매한 상태란 결국 신 또는 신적 이성, 교회가 모든 진리의 본부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종래의 인식론은 신이 중심.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고 그 세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관찰자이다. 어떤 대상, 무엇인가가 있는데 인간은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파악을 한다. 즉 그 대상이 중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는 주어 될 수 있는 모든 개체들이 주체이다. 상식실재론이라고도 부른다. 실재하는 세계는 인간과 상관없이 인간이 보든 말든 인간이 세상에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존재한다.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진짜 세계, 사물 그 자체의 모습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이 볼 때의 모습이다. 그래서 본질적 사물 그 자체도 초월적인 것이다. 초월적 실재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실재하는 것은 인간을 넘어가(초월해) 있다.


그런데, 그런 초월적 세상에 대해서 어떠하다, 존재한다라고 누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 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한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권리가 있지만, 내가 안 봐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 신이보기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 - 자신이 신이 아니면서 무슨 권리로 신에 대해서 자신이 얘기를 할 수 있는가. 월권이다. 내가 안 봐도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추정이지 자신 있게 확신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내용은 자신이 보는 한에서 그렇다. 이고 칸트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세상을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본다. 대상을 규정하는 내가 주어이고 주인이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 이것이 넘어가는, 초월하는 것이다. 즉, 내가 넘어가고 초월하는 것이다. 내가 초월하는 ego를 가진다.


칸트입장에서 데카르트도 초월적 실재론자였다.
"나는(ego) 무엇인가를(cogitatum) 생각한다(cogito)." 내가 있고 내가 의식을 하면 의식활동에 걸리는 내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명료하고 분명한 지각이라고 말했다. 내가 꿈을 꾸면 꿈의 내용이 있고 내가 감각하면 감각의 내용이 있으니까 이것은 분명하고 명료하다는 것. 여기서 부터 논의를 출발시켜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


칸트는 지각에다가 지각을 하나 더 덧붙인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의식이 이중화 되는 것. 통각이라는 개념인데, 이 통각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내용의 틀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바로 이 것이 초월하는 작용이다. 내가 대상으로 초월해서 들어가는 작용.  존재의 세계라는 것은 대상의 세계이고 대상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주관(이성)에 의해서 규정된 세계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자들에게 자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과학자들이 자연은 이러이러한 것이다고 얘기해주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 드릴터인데, 사실 자연은 자연과학자들에 의해서 파악된 세계이다. 자연은 사람에 의해 인식된 세계이다. 그 자체로 있는 세계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 보자는 것이 칸트이며,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정리하면, 주어가 주체가 누구냐에 대한 의견 차이이다.
사물 자체라고 보는 것이 종래의 상식 실재론, 초월적 실재론(실재하는 것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해 있다.)이라고 한다면 칸트에 오면 인간이 파악한 내용이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자기 철학을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어느 것이 사실에 부합하느냐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우리가 뭘 중심에 놓고 볼고냐의 관점의 문제인데 칸트는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인간이라는 주관(이성)의 관점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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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항상 다 같은 의미로 있다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는다. 플라폰은 "진짜로 있는 것은 이데아다."고 말하지만 칸트는 "그런게 어디 있냐"고 한다. 플라톤이 쓴 있다는 무슨 의미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존재한다(있다)."고 했는데 그 있다는 무슨 의미인가, 데카르트가 있다라고 말한 것은 신체가 아닌 생각하는 주체로서 정신, 이성이 있다라고 한 것인데. 그러면서 또 사물도 있다라고 말한다. '있다'는 사람들 마다 다 달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다의 개념이 애매모호하다고 했고 그래서 10개의 범주에서도 빠져있다. 그런데 칸트는 12개의 범주 중에 한 종류로 '있다'를 말한다.


칸트의 12범주에서의 '있음' 방식은 3가지이다.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있다, 반드시 있다"
칸트는 "있다"는 말은 어떤 것이 시공간상에서 수적으로 잴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근대 물리학의 개념을 받아드리는 것. (기하학(시공간)+수학(수적)) 따라서 영혼, 신은 시공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므로 있다고 말하기 힘들어 제거가 된다. 결국 종래의 형이상학적 존재자라고 하는 것은 다 무효가 되므로 이런 의미에서 칸트가 반 형이상학적이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나면, 공간과 시간은 있는것인가? 범주는 있는 것인가? 당연히 다 쓸 수 없는 말이다. 공간, 시간은 무엇인가 있는 것의 '틀'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관념이다. 의식의 틀이다. "있다"라는 말도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라는 것도 틀이고,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규정을 받으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규정하는 주체가 사람(의 이성, 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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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도 진리라고 하는 것을 전통적인 개념 그대로 받아들인다. 진리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 이 논의는 스콜라 철학때부터 논의 되었다.

여기서의 지성은 하나님의 지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지성에 부합하게 있으면, 진리라는 것은 참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나중에 이것이 로크처럼 초월적 실재론자에 오면 인간의 인식 내용이 사물과 합치하면 진리라고 생각한다.

허나 로크의 경우에 문제가 있다. 내가 철학강의를 하고 있는데 강의실에 1000명의 학생이 있고 강의실에는 칠판이 있다. 내가 "강의실에 칠판이 있다."라고 했을 때 이 것은 사실인가? 1000명의 학생 모두 사실이라고 동의 한다면 사실이가? 우리 1001명이 똑같이 그렇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야지 사실이다고 말 하면 안 된다. 사실이라는 것이 우리와 무관하다면 만명이 봐도 사실이 아닐 수 있고 한 명도 그렇게 안 봐도 사실 일 수 있다.

칸트는 말한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현재 과학적 지식 수준으로 세상이 그렇다고 말하면 끝. 그래서 사물의 틀이 인간 지성의 틀과 합치하면 진리이다.

사물 자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릐의 겸험 세계가 가상이고 진상은 우리와 무관하게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고 플라톤, 로크가 그러했다. 칸트는 현실세계에서 인간의 수학적 틀, 역학적 틀에 어떤 사태가 부합하면 그것을 진상으로, 우리의 경험을 세계를 진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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