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감각이 아닌 이성을 강조하였다.
앎의 열쇠로서의 이성.
사유를 통해 무엇을 아는 능력, 즉 이성적 능력
선(line)을 본적이 있는가?
- 우리가 선이라고 보는 것은 얇은 면이며 선은 점들의 집합이며 볼 수 없다.
선은 마음의 눈, 즉 이성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이성으로 보게 도와주는 장치가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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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나는 내가 참이라고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고,
이 거짓들을 토대로 쌓아올린 구조 자체가 무척 의심스럽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서 학문에서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을 하나라도 얻기 위해서는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기초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제1철학에 관한 성찰 -
데카르트의 두가지 동기
- 내가 알고있던 것들 중 틀린 것들이 많아서 바닦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그릇되었고 자신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해가 옳으니 기존의 세계를 비판하겠다.
밑바닦부터 모든 믿음들을 제거하고 다시 시작한다.
내가 가진 믿음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너무나도 많은 이러한 믿음들을 체계화해서 제거를 해 나감 => 방법적 회의
방법적 회의,
: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인식을 제거하고 확실한 인식만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에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의심이다.
첫번째 의심의 대상의 원리 : 감각은 믿을 만한 것이다.
감각의 불확실성
데카르트의 논변
: 때때로 감각은 우리를 속인다.
(vs 아리스토텔리스의 감각이론 : 우리의 감각이 대체로 참된 앎을 준다)
허나 감각이 때때로 속인다고 감각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감각을 비판하기 위한 더 강력한 탄탄한 논변이 필요한 데카르트=> 꿈의 논증
꿈의논증
: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들이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일 수 있으며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힘들다
여기가 강의실이라는 것이 확실하기 위해서는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가 강의실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가는 자가
그것이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증거가 있으면 여기가 현실 세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 증거조차 가상현실의 일부분 일 수 있다. 즉 증거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즉, 감각 감각에 근거한 모든 판단, 믿음은 회의의 대상이다.
남아있는 참인 믿음은?
감각에 근거한 진리가 아닌
1+1=2와 같이
이성에 근거한 진리만 온전히 믿을 수 있다.
허나 감각을 비판했듯이 이성에 근거한 진리도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모든 믿음들은 절대적 진리이기 힘들며
나의 이성조차 나를 속일 수 있다. => 악령의 가설
악령의 가설
: 전지전능한 악령이 나를 속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가설
1+1=2가 확실히 사실이기 위해서는, 전능한 악령이
나를 속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전능한 악령이 나를 속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1+1=2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어떠한 믿음도 확실하지 않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다. => 회의의 심연
회의의 심연
: 방법적 회의의 결과로 아무것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
꿈이 없는 의심의 상태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그런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봉착
진정한 앎은 불가능한 것일까?
회의주의적 입장에 도달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핵심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확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한치의 의심도 없을 수 있는 믿음이 있을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 회의의 심연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작업이
제2성찰부터 나타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명언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 데카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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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의 열쇠 : 생각하는 나
나의 생각의 내용은 거짓일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거짓일 수 없다.
의심을 하고, 회의를 하고, 두려워하고, 궁금해하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생각하는 주체로서서의 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을 안하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서 데카르트는
내가 비록 기만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만, 속임수가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어야한다.
즉, 의식활동은 투명하게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의식계의 오류 불가능성"을 얘기하였다.)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사유하는 존재이고 사유의 주체이다.
이것은 굉장이 혁명적인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존재의 의미는 감각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이제 사유하는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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