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4일 목요일

헤겔 : 정신현상학

강순전 교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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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사태를 분석하는 분석력이 탁월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보면 이건 철학적 인식에 관한 용어들의 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태를 쪼개고 또 쪼개어 분석하고 그 분석한 사태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할 줄 아는 철학자였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철학이 이러한 장점을 갖고 있지만  '형식주의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칸트는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어떤 형식을 통해서 인식이 이루어지는가'라고 하는 그 형식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다음에 그걸 벗어난 모든 내용은 경험 심리학의 내용이다, 이렇게 도외시했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을 읽어 보면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있다. 칸트가 처음에 감성론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얘기할 적에도 보면 계속 우리 인식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현상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는 얘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범주의 연역 부분에서도 보면 굉장히 한 얘기를 또 하면서 반복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일 들 정도로 반복하는데, 명민한 칸트의 독자라고 한다면(헤겔) 칸트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선생님, 만날 한 얘기 또하지 마시고 새로운 얘기 좀 하십시오." 헤겔이 보기에는 칸트는 아주 추상적인 형식, 그것만을 아주 면밀하게 분석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면서 '내 얘기가 이 얘기다.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해라'라고 하는 방식으로 계속 서술하고 있었다.

헤겔은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사전>이라하고 하는 자기의 철학을 집대성한 마지막 대표작에서 칸트를 빗대어 이렇게 얘기한다. '수영이라는 것은 물 속에 들어가서 배우는 것이지 물 바깥에서 이론적으로 아무리 배운다고 그래서 수영을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해석해보면, 칸트는 수영장에 들어가지 전에 학생들에게 수영의 이론에 대해 자세히 가르친다. 그러고 난 다음 '자, 이제 잘 배웠으니까 물에 들어가서 한번 해보세요.' 이것이 칸트식 수영교습법이다.
허나 헤겔은 수영은 물에서 떠서 이동하기 위한 기술 아니냐, 그러니깐 일단 학생을 물속에 집어넣고 "여러분, 어떻게 해야지 물에서 떠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세요" 이렇게 하면서 스스로, 수영의 대상인 물, 그 대상을 어떻게 지배하느냐라고 하는 방식을 터득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영은 잔잔한 풀장에서만 하는게 아니니 개울, 파도치는 바다 등, 이렇게 다른 물의 성질에 따라서 수영을 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고 대상을 그때그때 지배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야지 우리는 제대로 수영을 터득한 것이다라고 얘기할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를 형식주의 철학자라고 이야기 하면서 칸트의 얘기가 맞긴 맞는데 그 형식만 갖고는 세상을 설명하기에 너무 빈약하고 현실성에서 뒤떨어진다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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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상>의 겉표지에는 정신현상학이라고 되어있는데 속표지에는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고 부제를 가지고 있는 샘플들이 있다. 그것은 애초에 헤겔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제목으로 큰 책을 기획했는데 그 일부가 '의심의 경험의 학'이었고 책의 양이 방대해지니까 '의식의 경험의 학'에 해당하는 전체 내용을 전신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해서 출간을 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그 안에 있는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속지를 제거하지 않은 몇 개 샘플을 그대로 출판하는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라던가 기획의 변경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헤겔은 애초에 이 <정신현상학>의 내용을 '의식의 경험의 학'으로서 기획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경험의 내용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의 학' 이 말의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하게 된다면 정신현상학의 본질적인 특성을 알게 된다.

<정신현상학>의 주인공은 의식이다. 헤걸의 정신현상학은 "의식이 경험을 하면서 '정신'이라고 하는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의식의 경험 학'을 쓴 것이며, 이는 역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해서 여태까지 걸어온 길을 다시 조망(회고)"한다면 책의 제목처럼 '정신현상학'이라고 하는 책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갖고 있는 두가지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의식"과 "정신"이다.


* <정신형상학>에서의 인식 모델의 단계
: 감각적 확신 > 지각 > 오성 > 자기의식 > 이성 >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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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정신의 활동인데 '대상과 분리된 주체의 활동'이다. 그래서 의식은 항상 대상을 갖고 있고 그 대상과 대립해서 맞서서 주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의식은 항상 '~에 대한 의식'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자신의 밖에 있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리되고 대립돼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식의 과제는 자기의 인식이 목표이고 자기가 향하는 그 대상의 내용을 자기의 생각이 제대로 맞힐 것이냐 맞히지 못할 것이냐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이 의식의 내용에 적중할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식을 주관이라고 한다면 그 대상은 객관이다.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의식이라고 한다.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의식이 활동을 통해서 향하게 되는 목표라고 했는데 의식의 목표라는 하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대상하고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활동을 '인식'이라고 한다. 인식이란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는 것인데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파악했을때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을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한 진리의 정의에 따라서 볼 때 의식이라는 것은 자기 활동을 통해서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고 이러한 의식의 활동을 인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인식의 목표는 참된 인식, 그리고 참된 인식의 결과는 참된 지식, 즉 진리이다.

정리해보면, 의식은 주관과 객관이 통일돼서 더 이상 원리상으로 분리되지 않는 지점인 정신을 목표로 전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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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의식은 제일 먼저 어떤 방식으로 경험을 하는가
헤겔은 의식이 경험하는 방식을 가장 단순한 의식에서부터 점점 복잡한 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방식으로 얘기한다. 의식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어린이에서 청년이 되고 성년이 되고 노년으로 향해 가는 것이고 그 제일 끝의 노인이 바로 정신이다.

의식의 첫번쨰 모습은 가장 유치한 어린이다. 어린이에 해당하는 의식, 그러니깐 인식의 형태에 있어서 가장 순박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는 '감각적인 확신'이다. 가장 확실한 인식은 (감각적)확신이다.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추론의 과정을 거치게되면 오류가 있을 수 있다.가장 확실한 인식, 가장 진리를 착오없이 잘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그것을 직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감각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적 확신은 철학적으로 숙고를 해보면 가장 빈약한 인식으로 판명된다. 감각적 확신은 있는 그대로 포착해야 되기 때문에 매개된 인식이면 안 된다. 따라서 다른 무엇과 비교되어서는 안 되고 추론의 절차를 거쳐도 안 된다. 그렇기에 감각적 확신이 보는 대상은 책상이다 소금이다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을 언명할 수 없고 단순히 '이것'이라고만 얘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금이다라고 할 때 소금은 희고 짜고 딱딱하고 각지다 등의 여러가지 속성을 비교하고 종합해서 '이것은 소금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는 것인데 벌써 이것은 아주 복잡한 인식이다. 감각적 확신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언어를 통해 추상화 되지 않은 '이것'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을 통해 파악되는 '단순한 것'이다. 그리고 매개없이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별자'이다.

감각적 확신에서의 '이것'은 시간 속에 공간 속에 놓여져 있다. 헤겔은 이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하여 시간 속에 있는 있는 이것은 '지금' 그리고 공간 속에 있는 것은 '여기'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과 '여기'라고 하는 이 두가지 말의 분석을 통해서 '이것'이 갖고 있는 속성을 규명하는데, '이것'을 규명하는 '지금'과 '여기'는 내가 이것을 확인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복잡하게 달라지게 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많은 장소와 지금에 해당하는 많은 시간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단순한 것이고 개별자로 봤는데 그것을 시간(지금)과 공간(여기)에 입각해 잘 분석해보면 그 안에 복잡한 것이 들어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것을 '보편자'라고 얘기한다.

보편자란 두루두루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보편자는 감각의 확신의 결과로서 특정한 의미로서 보편자, 즉 "누적적인 보편자", "축적된 보편자"이다.

정리하면,
감각적 확신은 단순한 것이고 개별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철학적 반성을 통해 그것은 복잡한 것이고 보편자였다.

'감각적 확신'은 '지(知)'라고 하고 '이것'은 '대상'이라고도 하는데 감각적 확신이라고 하는 '지'는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것)'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다시 의식의 정의로 돌아가보면, 의식은 항상 대상을 가진고 지(감각적 확신)와 대상이 분리된 특성을 가지는 정신활동이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대상에 적중하는가 적중하지 않는가 이것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의식은 감각적 확신이 자기의 생각이 맞는가 틀리는가라고 하는 것을 항상 걱정한다.

의식은 항상 자기 자신이 생각했던 처음의 생각을 다시 반성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처음의 생각과 반대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의식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반성의 결과,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짐으로써 의식은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의식은 좌절하지만 철학자는 의식이 좌절한, 의식이 부딪쳐서 자기 자신이 오류다라고 생각한 이 결과에서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을 본다. 이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은 "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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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새로운 의식 형태이다. 지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드리는 대상은 '사물'이다. 그리고 이 사물은 '보편자'이다. 책상은 책상들과 동일하고 돌은 돌들과 동일하다. 모든 사물들은 자기동일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철학에서는 자기동일적인 보편자라고 한다.

다시말해 "모든 사물은 자기동일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보편성을 가지는 사물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 이 진리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두번째 의식형태, 지각이다. 이러한 지각의 개념은 영국 경험론의 인식 모델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헤겔은 첫번째 의식형태였던 감감적 확신과 마찬가지로 지각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았고 모순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사물이 보편자, 특히 자기동일적 보편자라고 생각을 하였다. 소금을 예로 들어보면, 소금은 희다, 딱딱하다, 각지다, 짜다 등의 성질들이 있는데 헤겔은 이러한 성질들이 서로 무관심하게 있는 것이라고 분석을 한다. 그리고 각 성질 또한 다른 것들과 구별됨으로써 질(성질)을 갖고 있어야만 소금이라는 것이 소금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희고 딱딱하고 각지고 짜지않고 단 것이 있다고 하면 그건 설탕이 되므로 소금이 설탕으로부터 구별되기 위해서는 짜다라는 독특한 성질이 있어야 된다. 이렇게 개별 성질들이 하나의 통일성 속에 들어가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물인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소금이 소금이기 위해서는 설탕이나 다른 것이 아니어야 한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해야지 소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배제하는,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행위가 있어야 되는데 구별이라는 것이 동시에 그 안에 들어와야 된다라는 것이다. 즉, 소금이라는 사물이 자기동일적 보편성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아닌 설탕과 같은 다른 것과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자기동일적 보편성 안에 자기동일적 보편성을 파괴하는 다른 것과의 관계성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관계성을 통해서만 자기동일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사유이다.

* 헤겔 철학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하면 변증법인데,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속담은 변증법을 잘 말해준다. 헤라클레이토스 표현으로 하면, 밤이라는고 하는 것은 낮이 있기 때문에 밤이다. 배고픔이라고 하는 것은 배부름이 있기 때문에 배고픔이다. 즉, 어떤 규정을 보면 그 반대가 있어야지만 그 규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 변증법적 규정이다. 어떤 남자가 아버지라고 불리려고 한다면 아들이 있어야 한다. 이와같이 어떤 개념은 반드시 반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하나의 개념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가 함께 그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의 통찰이다.


한번더 반복해서 설명하면,
우리는 사물은 홀로 있는 것이다. "being for itself(자기성)" , 독자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니 being for itself로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being for other(타자성)", 타자와 함께하는 존재, 타자와 관계 맺는 존재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탐구하는 진정한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고 그 사물은 자기동일적 보편성을 가진다고 생각했는데 이 자기동일적인 보편성으로서의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가져야하는가를 면밀하게 다시 반성을 해보니 관계성을 전체로 해야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동일적 보편자로 봤던 사물의 진리는 "관계성"이 된다. 사물은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해체돼버린다. 그러면 이 관계라는 것은 더이상 지각의 대상일 수 없다. 지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동일적인 사물을 받아드리는 것이지 두 개의 반대항으로 분리되어 있는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더이상 지각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파악하는 영역이 뭐냐, 관계를 파악하는 인식은 무엇인가. 헤겔은 그것을 '오성'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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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철학적인 방법을 서술하는데 있어 또 중요한 한가지 독특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양"이다. 지양이란 이전 단계를 부정하고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데 이 다음 단계는 전단계를 부정하지만 계기로서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감각적 확신이 부정되어서 지각으로 갔을 때 지각의 대상인 사물 안에 부정된 것들이 속성들로서 계기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지각의 대상의 사물은 더이상 진리를 담지 못하기에 그 다음 단계에서 관계를 결과로 가지게 되었는데 관계라는 것은 사물과 사물, 이 사이에서 진리가 있다는 것으로 전단계에서 부정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고 있다.

오성은 자연과학적 인식이다. 관계를 사유하는 의식은 오성이고 오성은 이 관계를 '법칙' 안에서 본다. 법칙은 관계에 대한 인식이고 특히 사물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오성에 있어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이것이 바로 진리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근대과학자들은 사물의 본성을 힘이라고 보았다. 힘은 두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유발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유발되는 힘이다. 예를들면 유발하는 힘은 지구의 인력이고 그 결과 떨어지는 사과가 유발되는 힘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유발되는 힘, 사과라는 현상을 보고 그것의 원인되는 유발하는 힘을 찾아내어 이것 사이의 인과 관계를 파악할 때 우리는 과학적 인식을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과학적 인식에서 현상들(사과의 색, 모습 등)에는 관심이 없다. 감각적인 현상은 다 배제하고 관계성이라고 하는 오성적인 내용만을 파악한다. 현상세계의 모습은 변화무쌍하다. 항상적인 것이 없고 변화한다. 하지만 법칙은 그 이면에 변하지 않는, 정지된 세계, 고요한 세계이다. 과학적 인식은 그 불변의 법칙 안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과학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 과학적 인식, 오성의 권위는 막강하다. 그런데 헤겔은 여기에서도 또 한번 변증법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우리의 과학적 인식을 한번 검토해 보고자 하는데 여기서의 검토는 뉴턴역학의 옳고 그름을 과학적으로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현상세계 이면의 고요하고 정지된 세계의 법칙이 참된 진리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가, 과학적 인식이 정말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가장 풍부하고 올바른 지식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법칙이란 현상을 추상화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법칙보다 보편적인 법칙이 과학의 세계에서는 더 권위를 가진다.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단순한 법칙이 최상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정적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현상은 다양하고 생동감이 있다. 그 현상을 추상해서 법칙에 이르는데 그 법칙을 또 추상해서 가장 단순한 법칙으로 나아간다면. 우리가 애초에 설명하고자 했던 대상이 현상으로서의 대상이고 그 대상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것, 대상으로부터 가장 추상된 것이 가장 참된 진리다라고 하는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정리하면, 헤겔은 이 오성이라고 하는 과학적 인식을 반성해 봤을 때 오히려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빈약하고 추상적인 인식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법칙이라는 것이 결국 현상이 자기를 구별하고 분화해가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현상 안에 진리가 담겨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어있는 법칙의 세계보다는 그것을 뒤집어 놓은 현상이 (헤겔의 표현으로는 "전도된 세계, 뒤집은 세계") 참된 진리의 담지자이다. 전도된 현상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 자기의식의 발생 :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지만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
두 대상의 '관계'를 받아드리기 위해 두 종류의 힘을 아우르는 하나의 힘으로 추상화 하는 '오성'적 의식은 현상을 매개로 하여 바로 이 현상의 배후를 투시할 수 있게끔 초감각적인 세계와 연결되기에 이르른다. 오성에 의해 '초감각적 세계'들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초감각적 세계는 같은 방식으로 제2의 초감각적 세계를 발생시킨다. 두 개의 초감각적 세계는 또 다시 대립하면서 현상계로 복귀하게 된다. 결국 처음의 출발한 현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데 이 무한한 반복을 자기동일화 하는 운동이라 말하며, 이러한 무한성을 통해 자기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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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 확신은 단순한 성질이 진리라고 했지만 지각은 그것들을 지양해 포함하고 있는 사물이 진리라고 했다. 사물은 다시 지양돼 오성이 파악하는 법칙의 한 계기가 됐다. 법칙은 다시 그것을 지양하여 포함하는, 법칙의 뒤집어진 세계로서의 현상 세계의 한 계기가 됐다.

헤겔은 이 현상 세계가 법칙의 뒤집어진 세계라고 하는데, 이때 뒤집어졌다는 것은 법칙의 부정을 의미한다. 헤겔은 뒤집어진 세계의 논리가 "생명"의 논리와 같다고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법칙에 대한 지식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생명에 대한 지식이다. 의식의 경험에서 이제 새로운 대상은 생명이다. 지금까지 의식은 자신과 다른 대상에 대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기와 동일한 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은 자기의식이다. 

다시 반복해서 설명하면,
'감각적 확신'부터 시작해서 '지각'을 거쳐 '오성'까지, 이 세가지 인식형태를 우리는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은 대상의식의 준말이다. 위에서 의식이 무엇인지 얘기했듯이 이 세가지 의식은 '대상에 관한 의식'이고 여기서 대상은 물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을 파악하는 나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다. 그러니까 주체와 객체가 질적으로 다른 것이고 이 것이 대상의식의 특징이다.
반면 자기의식은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자기의식은 '생명'을 인식한다. 자기의식은 인식의 대상으로서는 자기와 똑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  즉 인간을 대상으로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책상, 소금 이런 것들이 대상이었는데 자기의식에 오면 자기와 대상이 동일해진다.

인간은 동물과 같은 생명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식을 가진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이중적 특성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식으로서 다른 인간을 볼 때 처음에는 인간을 자기의식적 존재로 보지 않고 생명으로만 본다. 소, 돼지처럼 생명만 가지고 있는 동물로 보지 상대도 자신과 똑같이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라고 인정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타인을 자기의식으로서, 자존감을 가지는 사람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고 원초적본능에 따라서는 상대를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옛날에는 전쟁 후 포로를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노예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듯 인간이 인가대접을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당연히 타인도 나를 똑같이 생명으로만 바라본다. 서로가 욕구만 가지고 있는 상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그러한 두 욕구의 덩어리가 있는 것이다. 이 욕구는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이 일어난다. 이때의 충돌이라고 하는 것은 투쟁, 싸움으로 나타나고 이 싸움에서 지면 노예가 되는 것이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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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쟁의 목적은 무엇일까. 자기가 자의식을 가지는 주체로서, 객체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이 투쟁의 결과 주인과 노예로 나뉘게 된다. 주인과 노예는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규정(반대규정)이다. 헤겔은 여기서 또 반증법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다. 노예가 없으면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주인-노예 관계를 더 발전시켜나가 보자. (헤겔의 주노변증법)
주인은 자유롭다. 그런데 이 자유는 편협한 자유이다. 나만 자유롭고 너는 자유로운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인은 "편협한 자유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은 독자성이고 주인의식이다.
반면 노예는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을 해야만 한다. 노예는 한편으로는 주인 한편으로는 자연, 이 둘 사이에 끼어있다. 노예는 주인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그만큼 주인은 강력한 자립성으로 존재한다. 자연 또한 마찬가지로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노예가 자연을 잘 다루는 기술을 개발, 터득하기 전에는 자연도 강한 자립성으로 노예에게 저항한다. 이렇게 노예는 주인과 자연 사이에 껴서 '아, 세상이라는 것은 왜 이럴까'라고 자기 자신 안의 의식안으로 떠밀려든다. 그래서 이것을 "떠밀려 든 의식"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는 철학적인 숙고를 한다. 이 숙고를 통해 주인을 바라보니 주인은 독자적인 존재이고 주체성이 있고 탁월한 성품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노예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인이 인간이니깐 자유롭고 존엄한데 나도 인간이니깐 자유롭고 존업해야 된다." 그러면서 주인을 보고 간접적으로 독자성, 주체성,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인지하게 된다. 물론 주인에게 대항해서 그것들을 쟁취할 수는 없다. 그렇게 했다면 그건 벌써 노예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는 자연을 대상으로 그것들을 실현한다. 자연을 가공을 하면서 자연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의지대로 변화된다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노동'이라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의식을 대상 속에 투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식, 자기의지대로 대상을 변형하는 것이 노동이다. 그리고 노예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변하는 자연을 보면서 '그러므로 나는 자연의 주인이다'는 생각을 갖는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서 주인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주인보다도 노예가 탁월한 철학적인 사유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주인은 인정투쟁에서 승리하여 나만 자유롭고 패배한 노예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유만 주장하는 편협한 자유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예는 주인의 자유를 받아드리면서 나도 역시 인간으로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노동을 통해서 그것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보편적 자유의식"을 갖게 된다.

자신과 타인 모두를 인정할 때, 그 때 우리는 보편적 자유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고 이 상호인정 속에서 법과 도덕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도덕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자유가 있어야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 루소, 칸트 등은 사회계약론을 주장한다. 사회라고 하는 것이 계약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고 얘기하는데,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사회 형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인정투정을 해서 주인과 노예로 갈라지지만 결국에는 주인도 참된 인간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 노예, 타자를 인정해야 된다라는 그런 보편적인 자유의 의식에 도달해야한다. 그래야지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자기의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상호승인이 된 사회가 헤겔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사회이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불평등이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보편적 자유의식이 그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주인이면서 또한 노예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판매자이자 구매자이다. 상품을 구매할 때에는 남의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는 주인이 된다.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만들어서 판매할 때, 노동력을 제공할 때에는 남을 위해 노예가 된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 속에 구현되고 있는 인격은 상호승인, 즉 평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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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의 결과는 보편적 자기의식이었다. 이 보편적 자기의식이 "이성"이다.

보편적 자기의식은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된 의식이다. 이것은 칸트가 말하는 인간의 의식이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입장을 비판한다. 세계는 인간 안에 미리 구비돼 있는, 보는 방식에 의해 그러그러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인식을 그때그때 세계의 내용에 맞춰 가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관 안에 보편적 자기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실천의 측면에서 보편적 자기의식은 실천 이성이다. 실천 이성은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주관적 의식의 보편에 머물 뿐 객관적 현실에까지 높여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인간 주관에 공통된 것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의 도덕 법칙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주관적 의식 안에 머무는 보편이지 객관적 현실을 반영해 거기에까지 내용적으로 높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 속에서 실천하면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내용을 습득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객관적 현실로 높여진 이성이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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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정신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전개하는 첫 번째 형상을 ‘참된 정신’, 진리적인 정신(der wahrhafte Geist)이라고 칭하며 그것의 역사적 모델을 고대의 인륜성에서 본다.

헤겔은 중세의 신앙과 근세의 계몽이 이러한 정신의 자기 소외를 대변한다고 한다. 중세의 신앙 속에서 헤겔은 차안과 피안으로 분열된 세계를 보며, 중세의 신앙을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로 파악한다. 헤겔은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인 도덕적 양심이 상호 주관성을 통해 현실적으로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정신으로서 절대지에 이르러 정신은 의식, 자기의식, 이성, 정신, 종교에 걸치는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자신이 자신을 알아 가는 과정이었음을 안다. 결국 절대지가 객체를 주관성의 형식으로 변형하고 대상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절대지의 자기 인식의 작용이었다.

절대지는 대상들을 관통하는 진리의 내용으로서, 지와 대상이 궁극적으로 통일되는 의식의 경험의 학, <정신현상학>의 종점이며, 아직 실재로 나타나기 이전에 신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의 순수한 이념을 서술하는 <논리의 학>의 출발점이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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