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4일 목요일

근대철학 : 칸트 02

이성과 자연의 관계를 먼저 다시 정리 해 보자

: 미래가 과거와 유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

칸트 : 모든 변화는 자연법칙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성의 틀로 그런 법칙적인 변화만을 자연에 투사하기 때문에 법칙적이지 않을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이 있기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알게된다라기 보다
이성이 자연을 파악하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자연이 인간에게 이해되고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난다.

즉, 이 세계는 이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기 떄문에
인간이 제시하는 틀 자체가 자연의 규칙성, 법칙성을 확보해 준다는 주장으로
흄이 제기한 "자연법칙의 확실성에 대한 의문"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대로라면
자연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확실하게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인지 설명이 되고
어떤 법칙 하에서 일어난다는 결론을 받으드릴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되면 우리의 모든 행동가 모든 행위, 심지어 우리의 생각마저도
자연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전부 결정되어있다라는 결론과 가까워진다.

결정론
: 인간의 행위를 포함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인과관계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


모든 변화가 자연의 법칙에서만 일어난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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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이중적 존재로서의 인간
: 자연계(사실)의 인간, 도덕계(당위)의 인간

만약 내가 도둑질을 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런 행동은
인과의 자연 법칙에 따라서 (중략) 필연적으로 나온 결과이고,
그래서 그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음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도덕 법칙에 따른 가치판단이 (중략) 이 점에서
사정을 변경시켜 그런 행동은 안 할 수도 있었다고 전제 할 수 있겠는가?

- 실천이성비판 -

도둑질을 한 사람이 자연법칙에 따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 사람이 도둑질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었겠는냐, 는 문제지적이다.

"너 도둑질을 하지 말았어야 해.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 된 것이니까"
라는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

도덕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요청이 당위적으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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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정념의 노예에 불과하다."

- 흄 -


이성은 감정이나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도덕판단이라는 것도 마음에서 이는 승인, 불승인의 감정에 불과하다.
이타주의는 공감에 근거한다.
=> 도덕적 판단도 정념(감정, 정서)의 영역


* 흄의 입장에 대한 칸트의 반박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도 많아서
그들은 허영이나 사익과 같은 어떤 다른 동인 없이도
자기 주위에 기쁨을 확대시키는 데서 내적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의 작품인 한에서 타인의 만족을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주장하거니와, 그러한 경우에 그 같은 행위는(중략)
매우 사랑 받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왜나하면 (중략) 의무로부터 행하는 윤리적 내용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박애가의 마음이 자신의 깊은 슬픔으로 흐려져
타인의 운명에 대한 모든 동정심을 없애 버렸고
그는 여전히 고난 받고 있는 타인들을 돌볼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고난에 극도로 얽매여 있기 때문에
남의 고난은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어떤 경향성도 더 이상 그를 그렇게 하도록 자극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 치명적인 무감수성에서 벗어나
아무런 경향성 없이, 오직 의무에서 그 행위를 할 때,
그 때 그 행위는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 윤리형이상학 정초 -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윤리학 분야에서 칸트가 저술한 최초의 주요 저서로, 도덕성 최고의 원리를 탐구, 확립함으로써 윤리형이상학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


감성, 감정은 우연적이며 변화하기 쉽다.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요소에 도덕의 기초를 세울 수 없다.

감정적, 정서적 경향에 뿌리를 둔 도덕은
도덕 자체의 의미와 역할을 축소한다.

감정적, 감성적 경향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예컨대, 아주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씨 좋음의 근원은
천부적으로 주어졌거나 그 사람의 좋은 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선한 마음은 무척 좋은 것이기는 하나 도덕적 칭송을 받을 것은 아니다.
그 근거가 그의 내적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치명적인 무감수성임에도 불구하도 도와야 된다라는 의무!
하고 싶어사가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진정한 도덕이다.


칸트의 도덕적 기초 : 이성
- 감정, 감성, 정념에서 주어진 목표만을 추구하는 인간상 거부
- 목표를 검토, 평가하는 이성
- 나 자신으로부터 유발되는 원칙의 출처로서의 이성
- 보편적 구속력을 갖는 도덕적 원칙을 제시하는 이성
  : 명령으로서의 도덕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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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고
도덕이라는 것은 정념이 아닌 이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했을 때
자유로우면서도 이성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어떤 보편적인 법칙이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드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은
'대체 왜, 자유로운 존재가 구속력을 받아드리는가?' 이다.

칸트가 하려는 바는 자유로운 존재와 구속, 이 둘의 조화이다.
"어떻게 자유로운 존재가 어떻게 보편적 법칙에 스스로를 묶을 것인가?"

이러한 고민을 한 끝에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개념 : 자율

타율 - '외부로부터 강제된 법칙'에 구속
자율 - '스스로 법칙'에 구속

법칙이라 함은 보편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이고
그 법칙을 확인하는 능력은 이성이며
내가 스스로를 그 법칙에 구속하기 때문에 자유는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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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인 내가
나 스스로에게 적용시킬,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할
그러한 원칙, 법칙은 무엇일까?


개별적인 목표와 보편적인 목표
조건적인 명령과 무조건적인 명령

* 칸트가 주목했던 것
 : 우리의 행동은 대체적으로 어떤 특정한 목표를 갖고 있고
  그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가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목표를 설정하면 그에 맞는 합리적 행동방식이 제공되고
그러한 행동방식이 합리적이라는 명령, 법칙이 있게 된다.

그래서 각각의 목적, 목표에 따라서 생겨나는 각각의 명령은 많은데,
칸트는 이러한 명령보다는 목적을 공유하지 않고,
보편적인 목표가 있을 때 제시되는 명령이
보다 중요한 도덕적 법칙이 근원이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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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언명령
개별적인, 특정 목표를 의지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령
: 그 목표를 의지할 때만 유효

훌륭한 연주가가 되기 위해서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한다.
허나 훌륭한 연주가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명령은 구속력이 없다.

도덕법칙을 가언명령의 형태로 적용시키게 되면
나는 어떠한 선한 가치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덕적 명령을 회피하고 벗어날 수 있다.
(가언명령에 근거한 도덕적 법칙은
목표가 공유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공동의 목표라고 하면 해결되지 않는가?
자유로운 존재에게
자신의 이성에 근거하여 목표를 정할 수 있는 존재에게
특정 목표를 공동의 목표라고 얘기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스스로 목표를 정하기 때문에
가언명령에 근거한 도덕적 법칙을 강요할 수 없다.



정언명령
개별목표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령
: 특정한 목표를 의지하지 않아도 유효

어떠한 목표를 의지하더라도 나에게 적용이 되는 명령이 있다면
도덕적인 명령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편적 법칙의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 순수이성비판 -


준칙 vs 보편적 법칙

준칙 : 개인적 차원에서의 행동 원칙
보편적 법칙 : 모두에게 적용되는 행동 원칙

어떻게 정언명령이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적용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래에서 예를 통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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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칙 : 내가 돈을 갚을 수 없더라도 필요하면 빌리고 갚겠다고 거짓 약속을 하겠다.

나는 서근철을 만나서 갚을 생각이 없지만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짓 약속을 하고 돈을 빌린다.
"돈을 빌려줘. 일주일 후에 갚을께."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의지하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에 예를 적용하면,

필요할때는 거짓말을 하겠다라는 나의 행동 원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내가 욕구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나의 준칙이 모두가 알고있는 준칙이 되고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욕구하고 의지하여서 그렇게 되었다면

서근철은 "갚을 생각이 없으면서 빌리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라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 얘기할 것이다.

* 거짓말을 하려 할 때, 그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
: 다른 사람은 거짓말을 안하고, 약속을 지키고
  나만 약속을 안 지킬때 나의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다.

서로에게 서로가, 모두가 약속을 지키고
그래서 서로서로 의지하는 것이 정상인 상황에서만
거짓말이라는 현상이 가능해 지는 것인데

나의 행동의 밑바탕이 되는 그 준칙은 보편화 시키게 되면
거짓말이 보편화 되고 거짓말이 기능을 할 수가 없다.

=> 나의 "준칙"은 "보편적 법칙"과 충돌
=> 실천적 모순의 발생

(실천적 모순 : 목적을 이루려는 의지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을 수행하려는 의지 간의 충돌로 목적 달성이 저해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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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법칙과 충돌하는 준칙은
행동의 도덕적 기초가 될 수 없다.

정언명령의 성립 조건
: 준칙이 보편화 될 수 있는지의 여부 확인

정언명령은 특이하게도
남을 항상 도와라
거짓말을 하지마라
착하게 살아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라고 하지 않는다.

정언명령은 말한다.
당신이 어떠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
그 행동에 기초가 되는 너의 개인적인 행동 원칙이
너 스스로 본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의지 할 수 있는지 보라

오늘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는 여기서 다 걸러진다.

결국, 나만이 예외일 거라는 가정을 했을 때만 가능한 행동은
보편적으로 용납이 되는 행동이 아니다.
모두가 했을 때 용납이 되는 행동들만이
도덕적 행동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 정언명령의 정리
- 형식적 규정에 불과
- 준칙의 내용 자체를 규정하지 않음
- 준칙이 보편화되는지 여부만 점검 해줌
- 우리의 자유로운 목표는 허용
- 단, 보편화 과정을 통과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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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정언명령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인격성의 정식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 윤리형이상학 정초 -


인격성의 정식
: 이성과 자율성이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성과 자율성을 지닌 모든 인격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주장

나만이 특별하고 남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 지위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루려고 하는 목표의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의 예)
모두가 진실된 사람들인데 나만이 특별히 거짓말을 할 수 있어서
그 것을 이용하여 내가 돈을 얻는 수단으로 거짓말을 하여
상대를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인경성의 정식 = 정언명령의 정식

모든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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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아잇는 의문점
자연 속의 인간 & 자유로운 인간

행동의 주체는 자연 속의 주체로서의 나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나인가


모든 변화는 자연법칙 속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로운 이성의 틀로 그런 법칙적인 변화만을
자연에 투사하기 때문에 법칙적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자연세계의 법칙에는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자유의 세계, 당위의 세계에 있다.


질문을 해보자.

서근철에게 거짓말을 하고 돈을 빌리려했던 나는 어느 세계에 있는가
그러한 행동의 주체는 어느 세계의 자아인가?
어느 세계의 내가 처벌 받아야 하는걸까?

자연세계의 현상적 자아 나라면 결정론적 관점으로서 법칙에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처벌은 당연히 현실의 현상적 자아가 받게 된다.
물론 자유의 세계, 당위의 자아 탓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자연의 영역과 단위의 영역의 관계가 불분명 하다.


*현상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관계
1. '이중 자아' 해석 : 왜 현상적 자아가 처벌 받는가
2. '동일성' 해석 : 어떻게 동일한 것이 이렇게 상반된 성격을 지니는가?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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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문점

나의 준칙이 보편화 되는 것이 핵식점 사안인데
우리가 정확하게 그 보편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나에게 좀 유리하게 보편화 과정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새치기를 하는 것으로 준칙을 세우면
세치기가 보편적 법칙이 되어서
세치기가 불가능 해진다.

준칙을 "아주 급한사람만 새체기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세운다면?

인간은 완벽한가?
그리고 인간은 이성을 이상적으로 사용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 그리고 회의는
실존의 문제이고 포스트 모던적인 측면으로 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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